▲서울 광화문광장의 촛불집회.
김종성
박근혜를 보고 정반대의 관측을 하는 사람들국민을 화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박근혜만 생각하면, 국민들은 가슴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데 그런 박근혜를 보고 정반대의 관측을 하고 있을 사람들이 있다. 지금 박근혜가 정상적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19일 토요일 서울역에 모여 퇴진 반대운동을 한 박사모 회원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서양 민주주의의 원조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인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촛불집회와 청와대 움직임을 본다면, 그들은 박근혜가 국민 뜻에 따라 처신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판단할 거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게 결코 과장되거나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은 이 글의 끝부분에서 나타날 것이다.
한국에서는 2007년부터 주민소환법이 시행되고 있다. 유권자들은 이 법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을 직접 끌어내릴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을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대통령을 상대로 한 국민소환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를 비롯한 실라쿠스·아르고스·메가라·밀레투스 같은 일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는 직접민주주의의 일환인 국민소환제가 한동안 시행되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도편추방법이다.
도편추방법은 독재자가 됐거나 될 가능성이 있거나 나라를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이 있는 지도자를 몰아내기 위한 제도였다. 일종의 탄핵 투표였다. 서기 1세기에 태어난 플루타르코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으로 흔히 불리는 <영웅전>이란 역사서에서 "이것은 압제적인 권력을 행사한다고 생각되는 사람, 진정한 민주적 평등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가해지는 조치였다"고 설명했다.
도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ostraca는 조개껍질이나 그릇조각을 의미한다. 이것이 고대 그리스의 일부 도시국가들에서는 투표용지로 사용되었다. 여기다가 자기 의사를 적을 수 있는 유권자는 노예를 제외한 자유인이었다. 아테네의 경우에는 20만 정도의 인구 중에서 3만 정도가 투표권을 갖고 있었다.
도편을 통한 그리스인들의 투표는 지금의 투표와 여러 가지 면에서 달랐다. 먼저, 투표용지의 준비 방식부터가 달랐다. 지금은 나라에서 투표용지를 지급하지만, 그리스에서는 본인이 직접 도편을 준비해야 했다. 도편을 따로 살 여유가 없으면, 찬장 안의 그릇이라도 깨서 도편을 준비해야 했다.
신분증을 지참한 오늘날의 유권자들은 곳곳에 산재한 투표소로 가지만, 도편을 소지한 고대 그리스 유권자들은 시내 중심의 광장으로 죄다 모여들었다. 아테네의 경우에는 그 유명한 아고라가 그런 장소였다. 투표소로 쓰이는 광장에는 울타리가 쳐졌다. 유권자들이 드나들 통로만 남겨두고 사방에 울타리를 쳤던 것이다.
싫은 정치인의 이름 직접 기입 '도편추방제'현대의 유권자들은 자기 투표가 끝나면 투표소를 떠나야 하지만, 그리스 유권자들은 참가자 전원의 투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 번 투표한 사람이 또다시 투표하는 이중 투표를 방지할 목적이었다.
그래서 광장에 들어간 사람은 투표가 종료될 때까지 계속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도편 투표는 일종의 집회 같았다. 많으면 3만 이상의 유권자가 한 장소에 모여 투표했기 때문에, 이것은 지금의 촛불집회만큼의 열기를 뿜어낼 수 있었다.
지금의 유권자들은 투표소에 가서 기표를 하지만, 그리스 유권자들은 광장에 가기 전에 미리 도편에 표기를 했다. 오늘날에는 좋아하는 후보나 정당 이름 옆에 도장을 찍지만, 그리스에서는 싫은 정치인의 이름을 직접 기입했다.
그리스 유권자들은 여기에 더해 한 가지를 추가했다. 도편에 정치인 이름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말까지 기입했다. 예컨대, "떠나라!"나 "나가라!" 등의 구호를 적었다. 우리가 토요일마다 광장에서 보는 전단지 구호들이 그리스인들의 도편에 똑같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