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대성이가 칼로..." 교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2부 교단일기 (6)

등록 2016.11.24 16:10수정 2016.11.24 16:10
9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LA 공항에서 만난 제자


2004년 1월 31일, 이른 아침 전화벨에 잠이 깼다. 전화를 받고 보니 뜻밖에도 진천규 기자였다. 그날 나는 <오마이뉴스> 독자들의 성금으로 우국지사 권중희 선생과 함께 백범 암살배후 진상을 규명코자 미국으로 출국하는 날이었다. 그는 미국 LA 한국일보 기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국내 보도를 통해 나의 미국 방문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몇 시 비행기로 출국하느냐고 물었다.

그날 오전 10시(현지시간) LA 공항에 닿아 입국수속을 마치고 대합실로 나가자 꺽다리인 그가 손을 번쩍 치켜들면서 "선생님!" 하고 불렀다. 만리타향에서 옛 제자를 만나니까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a

LA 공항에서 (오른쪽부터 고 권중희 선생, 진천규 기자, 박도 기자) ⓒ 박도


그의 곁에는 우리 일행의 방미를 환영하고자 나온 재미동포들도 여럿 있었다. 그날 나와 권 선생은 워싱턴행 비행기로 갈아타기까지 6시간 동안 그의 안내로  LA 시가지를 일주하면서 무료했을 시간을 매우 즐겁게 보냈다.

그는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때 공동취재기자단으로 평양을 다녀온 뒤 한겨레신문사를 퇴사하고, 곧장 미주 한국일보 기자로 자리를 옮긴 그간의 신상 변화를 들려줬다. 그는 6·15 때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동선언문에 합의 서명한 뒤, 손을 맞잡고 들어 올리는 역사적인 장면은 바로 자기가 직접 셔터를 누른 작품이라고 내게 자랑했다. 나는 그의 자랑이 대견해 보였다.

[관련 기사] 어느 제자와 네 번 만난 이야기


내가 그에게 전공과는 달리 굳이 사진기자가 됐느냐고 물었더니, 천만뜻밖에도 내 탓이라고 했다. 중1 때 담임이었던 내가 학교 행사나 소풍 때 카메라로 자기들을 열심히 찍어주는 그 모습에 매료됐다고 했다. 그래서 부모님을 졸라 당시로서는 비싼 카메라를 사달라고 떼를 써서 가지게 됐고, 그것이 계기가 돼 사진 찍는 취미생활을 하다가 마침내는 전문직업인이 됐다는 설명이다.

그날 그는 미주 한국일보 기자로 우리 일행을 취재하였고, 나는 시민기자로 그를 취재하는 특별한 '사제의 만남'이었다. 미국에서 귀국 길에도 LA를 경유했는데, 그의 LA 현지 보도로 우리 일행은 많은 동포들의 환영도 받았고, 그의 안내로 조금도 불편함이 없이 3박 4일간 LA에 머무를 수 있었다. 

a

LA에서 만난 오산제자 박정헌 군(오른쪽)과 산타모니카 해변에서(2004. 3.) ⓒ 박도


어느 어머니

어느 하루,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가는데 아이들이 웅성웅성 복도를 메웠다.

"대성이 엄마다."

녀석들은 신기한 구경거리나 된 듯 법석을 떨었다. 나는 야단을 쳐서 아이들을 흩어 보내고 어머니를 내 자리로 안내했다. 어머니는 다섯 살가량의 노란 머리 파란 눈의 소녀를 데리고 왔다.

어머니의 외모와 차림은 얼른 보아도 미군 부대 인근에 사는 여인임을 짐작케 했다. 머리는 노랗게 염색했고 얼굴에는 오랜 동안 짙은 화장의 흔적이 역력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어머니는 금세 울먹거렸다.

"학교에서 자기편은 선생님밖에 없대요."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교무실의 선생님들의 눈길이 모두 내 자리로 쏠렸다. 호기심에 가득 찬 시선으로.

그해 입학식 날, 직원회를 마치고 운동장에 나가니 많은 신입생들이 반표지 팻말 앞에 정렬하고 있었다. 나는 녀석들이 귀여워 한 녀석씩 살펴 가면서 그들의 복장을 매만져 주고 볼을 쓰다듬어 주면서 뒤까지 훑어갔다.

맨 끝 녀석을 보니 피부가 새하얗고 코가 유난히 오뚝했다. 얼른 보아도 다문화가정의 자녀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녀석을 덥석 껴안았다.

"이름은?"
"백대성(가명)이요."
"누구랑 왔니?"
"혼자 왔어요."

내가 그의 어깨를 다독거리자 그 녀석은 싱긋 웃었다. 그날 학생들을 돌려보낸 후 그들이 제출한 환경 조사서를 정리하면서 대성이의 것을 유심히 살폈다. 본적은 경기도 파주군 용주골이었고, 현주소는 용산구 보광동으로 속칭 텍사스 골목이었다. 그리고 그의 성(姓)은 어머니를 따랐다.

며칠 후 그의 면담 차례였다.

"누구랑 사니?"
"엄마하고 여동생하고 셋이 살아요."
"아버지는?"
"미국에 계세요."
"엄마는 뭘 하시니?"
"몰라요."

녀석의 대답은 갑자기 퉁명해졌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자 녀석은 금세 싱긋 웃었다.

a

오산중 1-12반 학생들과 함께 교정에서(1972. 5.). ⓒ 박도


미운 오리 새끼

반 아이들은 그를 이름 대신 '헬로우'라고 불렀다. 반 녀석들은 그를 미운 오리 새끼 마냥 그냥 두질 않았다. 걸핏하면 '헬로우' '양키' '망키'라며 놀렸다. 그때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덤볐지만 중과부적, 늘 그의 일방적인 울음으로 끝났다.

나는 반 아이들에게 그를 괴롭히지 말라는 주의를 줬지만, 그때뿐. 내가 자리를 비울 때는 늘 반의 짓궂은 녀석들로부터 놀림을 당하는 모양이었다. 어느 날, 한 녀석이 헐레벌떡 교무실로 달려왔다.

"선생님, 대성이가 광준(가명)이를 칼로 찔렀어요."

깜짝 놀라 교실로 뛰어 갔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다. 나는 다친 녀석을 양호실로 데려 가서 치료를 받게 한 뒤 대성이를 교무실로 불렀다.

"왜 찔렀니?"
"자꾸만 놀리잖아요. 걘 날마다 못살게 굴어요."
"그렇다고 칼로 찌르면 어쩌니?"
"…."

대성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두 손등으로 번갈아 눈자위를 문지르기만 했다. 마침 다음 시간이 내 수업 시간이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예삿날과는 달리 찬물을 끼얹는 듯 조용했다.

"눈 감아!"

반 녀석들은 부동의 자세로 겁을 먹은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앞으로 반에서는 어떠한 경우라도 대성이를 놀려선 안 된다. 별명을 불러서도 안 돼!"
"네엣!"

대답이 우렁찼다.

"대성이가 너희와 겉모습이 다른 건 대성이의 잘못도, 대성이 어머니의 잘못도 아니다."

녀석들은 내 말귀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앞으로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면 선생님은 이유를 묻지 않고 너희들을 혼낼 테다. 알았냐?"
"네엣!"

a

오산중 1-12 반장(좌 박정우 군)과 부반장(우, 강동일 군)과 함께. ⓒ 박도

일제히 복창한 대답이 더욱 우렁차다. 반장 녀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일어나 말해봐."
"선생님,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일은 용서해 주십시오."

반 아이들을 훑어보니 모두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다.

"너희들 모두 약속할 수 있니?"
"네엣!"
"그럼 굳게 약속한 걸로 알고 오늘은 이만 용서한다."

거룩한 모성애

그날 그 사건 이후로는 반 녀석들이 대성이를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 그래도 내 눈을 피해 사소한 일은 있었다.

그러한 일들의 발단은 그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그는 반 아이들의 눈에 거슬리는 엉뚱한 짓을 자주 했고, 조금만 장난을 해도 피해의식이 많아 흉기를 들고 덤비거나 울음을 터뜨렸다.

"키우시기 힘드실 텐데, 왜 일찍 해외 입양을 시키지 않았습니까?"

나는 어머니에게 대단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하려고 몇 번이나 수속까지 밟다가 그만… 내가 낳은 자식 차마 내 손으로 뗄 수 없어 이때까지 미련스럽게 주리 끼고 있어요."

나는 순간 그 어머니의 모습이 오히려 성녀(聖女)처럼 보였다. 초등학교밖에 배우지 못한 어머니. 주위의 따가운 눈총과 자신의 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으면서도 차마 당신의 손으로 뗄 수 없는 그 뜨거운 본능, 거룩한 모성애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학교에는 오지 않으려고 결심했어요. 초등학교 때 몇 번 찾아갔더니 다른 애들이 놀린다고 걔가 한사코 말렸어요. 이즈음 집에 와서 선생님 말씀 자주 하기에… 선생님 죄송해요. 우리 대성이 때문에 속 많이 상하셨지요?"

어머니는 가방에서 양담배 한 포를 얼른 꺼내 내 책상 서랍에 넣고는 도망치듯 교무실을 떠나갔다. 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눈을 감았다.

그 녀석은 때때로 어머니가 편찮다고, 홀트 아동복지회에 양육비를 받으러 간다고 결석이 잦았다.

그새 45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는 지금 어느 하늘 아래서 살고 있을까?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박도 지음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장군>' 지금 막 출시되었습니다.(눈빛출판사 / 1만3000원)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댓글9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AD

AD

AD

인기기사

  1. 1 종영 '수사반장 1958'... 청년층이 호평한 이유
  2. 2 '초보 노인'이 실버아파트에서 경험한 신세계
  3. 3 '동원된' 아이들 데리고 5.18기념식 참가... 인솔 교사의 분노
  4. 4 "개도 만 원짜리 물고 다닌다"던 동네... 충격적인 현재
  5. 5 "4월부터 압록강을 타고 흐르는 것... 장관이에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