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곳곳에 있는 크고 작은 공원에는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성은
런던의 공원은 한 가지만 빼고 완벽했는데, 바로 비둘기가 문제였다. 물론 어느 나라 어느 공원이나 비둘기가 많은 것은 다름이 없다. 요즘 비둘기들은 옆으로 걸어가도 힐끔 쳐다보고 피하지도 않는다. 몰타에서는 걷다가 뚱뚱한 비둘기를 밟을 뻔하기도 했다. 나는 놀랐는데 그 녀석은 태연했었다. 그런데 영국 비둘기들은 거기에 한술 더 뜬다. 누군가 저 멀리서 비둘기에게 빵 부스러기라도 주는 사람이 있으면 이 녀석들이 거기로 날아가는데, 정말 최단거리 일직선으로 날아간다. 녀석들이 가는 비행경로에 사람이 서 있어도 피하지를 않는다.
벤치에 앉아 있는데 비둘기가 정면으로 날아왔다. 정말로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 정면으로 날아와 박치기를 하려는 순간 내가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비둘기한테 자존심이 상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등 뒤에서 날아오는 녀석들은 내 머리카락을 스치며 머리 위로 날아가거나, 날갯짓 소리가 귀에 들릴 만큼 가까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생각해봐도 런던 비둘기는 정말 드셌다.
공원에서 런던 시민들과 함께 햇볕을 즐기며 값싸고 푸짐한 점심을 먹고 일어났다. 배가 든든하니 다시 호랑이 기운이 솟았다. 샌드위치 한 조각과 샐러드 한 접시, 그리고 우유 몇 모금이면 근사한 식사가 된다. 바나나 몇 개도 괜찮고 폭신한 바게트 한 덩이도 괜찮았다. 그렇게 배를 채워가며 하루 평균 2만~3만 걸음씩 타박타박 걸으며 여행을 하고 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늘 허기가 졌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학교에 있으면 하루 3000걸음도 걷지 않는 날이 많았다. 학교 급식이 있으니 세 끼 식사는 꼬박꼬박 먹었었다. 그런데도 퇴근하고 교문을 나서면 견딜 수 없는 공복감이 밀려왔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집 주위에는 밤 12시에도 고기를 먹을 수 가게가 많았다. 숨도 쉬기 힘들 때까지 위를 가득 채우고 나면 그제야 피로감이 몰려오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었다. 정말로 배가 고파서 먹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단지 그렇게라도 내 하루를 보상받고 싶었던 것이다.
여행 기간이 길어지면서 음식에 대한 욕심이 점점 없어져 갔다. 입맛이 없다든가, 식욕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고지방, 고칼로리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지는 않게 되었다. SNS를 뒤덮는 먹방, 맛집 포스팅을 보면서 그 음식의 맛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던 내가 생각났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여행 덕분에 나는 조금 건강해진 것 같다.
소호를 벗어나 코번트 가든으로 향했다. 코번트 가든은 과거에 영국에서도 가장 크고 유명한 청과물 시장이었다. 지금은 청과물 시장 대신에 명품 매장부터 수공예품, 유명 식당까지 들어선 쇼핑의 중심이 되었다. 코번트 가든이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때문이다. 1964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는 흥행하지 못했지만, 영국에서는 아주 유명하다. 바로 주인공 오드리 헵번이 코번트 가든 앞에서 꽃을 파는 거리의 아가씨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시장 입구는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