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각 퇴진' 요구하며 청와대 향하는 시민들지난 3일 오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즉각퇴진의 날'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권우성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이런 '초현실적 뻔뻔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옳을까? 한국의 권위주의 정치세력은 늘 국민을 쉽게 속일 수 있는 어리석은 존재로 간주해 왔다. 그들에게 '국민'은 모호하고 뚜렷한 형태도 없는 '사람 덩어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은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 또는 '국적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여기서 국민은 국가의 통치를 받는 수동적 존재다. 이들은 노동력을 공급하고, 세금을 바치고, 통치자에게 표를 주고, 새끼를 낳아 차세대 노동자를 공급한 뒤 조용히 사라질 뿐이다.
이 관계에서는 국가가 주인이고 국민은 노예다. 국민은 자신의 권리를 알지 못하므로, 국가에 요구하는 법이 없다. 때리면 맞고, 주면 받아먹고, 안 주면 굶으면서 통치자들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신민'이다.
그런 면에서, 현 정부의 고위관료가 말한 '개, 돼지' 발언은 뚜렷한 역사성을 갖는다. "민중은 개, 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개, 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 주면 된다." 올해 7월, 교육부 정책기획관이었던 나향욱은 이 말로 큰 사회적 논란을 불러왔다.
교육부는 재빠르게 그를 파면했지만, 정부가 그 말에 당황한 까닭은 국민을 모욕해서라기보다는, 말해서는 안 될 진실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나향욱은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행정관을 지냈던 인물이다. 그의 발언은 보수정치세력이 '국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국민'과 달리, '시민'은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자신들의 권리를 잘 이해하고 있고, 그 당연한 권리를 행사할 줄 안다. 정부는 시민의 뜻을 대신해서 수행하는 '대의 기관'이므로, 국가는 시민의 명을 받드는 하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박근혜 정부의 실정과 부패를 겪으며 깨닫게 된 것은, 시민이 요구하지 않으면 주종관계가 뒤바뀐다는 점이다. 한국인은 과거 민주화 항쟁을 통해 절차적 민주화를 이뤘으나, 주인으로서 요구하는 법까지 배우지는 못했다. 오랫동안 독재의 어둠 속에 살아온 탓이다.
우리는 지금 촛불시위를 통해 자신을 '국민'에서 '시민'으로 바꿔가고 있다. 87년에 완결짓지 못했던 민주주의를 이제 비로소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이 말한 '선의'와 '국민의 뜻''시민'이라는 말은 왠지 생소하게 들린다. 현대에 이 말은 '부산시민,' '서울시민'처럼 도시 안에 거주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대 희랍시대에 '시민(citizen)'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지닌 자유인'을 의미했다.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은 '노예'였다.
시민은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한 권리를 행사한다. 누구도 법 위에 있을 수 없다. 법 위에 존재하려는 자들은 '티라노스(tyrannos)', 즉 '전제군주' 또는 '독재자'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선거와 반민주적 개헌을 통해 4번이나 대통령이 되려고 시도했다가 쫓겨난 '티라노스'였다.
이승만은 결코 순순히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부정선거에 대해서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 뗐고, 반정부 시위는 '공산당의 책동,' '반대파 정치인의 공작,' '일부 종교단체의 책동'이라고 주장하며 계엄령을 선포했다.
경찰의 폭력적 진압과 발포로 수백 명의 시민이 죽거나 다치자, 이승만 정부를 후원해 오던 미국 정부의 입장이 난처해 졌다. 독재정권을 비호한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매카나기 미국 대사가 찾아와 혁명적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이렇게 대꾸했다.
"젊은 시절 나는 내 국민들을 알고 있었고, 지금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그리고 더 많은 시민이 죽고 다쳤다. 그럴수록 훨씬 더 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가담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국민 뜻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고, 자신이 "'선의'로 한 일을 남들이 악용했다"며 억울해 하기도 했다.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이제 대통령의 신변마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경무대(현 청와대)의 구중궁궐에 칩거하던 지도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매카나기 대사가 미정부에 보고한 대로, 이승만 대통령이 "아첨을 좋아하고 비판자의 동기를 의심하는 그의 '잘 알려진 편견'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정적 문제는 '국민을 잘 알고 있다'는 잘못된 확신이었다.
결국 미 대사가 김정렬 국방장관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전했고, 미정보국(CIA)의 피어 드 실바까지 나서서 "2시간 안에 총사퇴하지 않으면 목숨을 보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제서야 이승만은 부랴부랴 하야 선언을 했다.
박근혜도 말하는 '선의'와 '국민의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