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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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은 1896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이듬해에 태어난 것이다. 아버지가 무역상이라 생활이 넉넉했던 그는 서당-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전문학교를 거쳐 중국과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허정이 고등보통 즉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이때는 일제강점기였다. 서울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YMCA 학당에도 나가 영어 등의 과외수업을 받았다. 이때 그를 가르친 교사 중 하나가 훗날 대통령이 되었다. 바로 이승만이다.
허정은 스물다섯 살인 1920년부터 미국 생활을 했다. 3·1운동 이듬해부터였던 것이다. 미국 생활 중에 그는 워싱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도왔다. 구미위원부를 이끈 사람은 이승만이다. 여기서 옛 스승을 만나 동지 겸 상관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이런 인연을 바탕으로 허정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에 이승만 대통령 하에서 교통부장관·사회부장관·국무총리서리·서울시장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했다.
이런 사람이 이승만 하야 뒤에 외무장관 자격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 과도정부를 이끌게 되었다. 외무장관이 대통령을 대행한 이유는, 바로 윗자리인 부통령직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중학교 때부터 이승만과 함께한 그 오랜 추억만 보더라도, 허정 권한대행이 이승만 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권한대행 허정의 목표는 크게 세 가지였다. 가장 중요한 첫째 목표는 이승만과 자유당 정치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4·19혁명의 촛불 속에서 이승만과 자유당 정치인들이 불타버리지 않도록 하는 게 그의 첫째 목표였다. 이들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 최소화되도록 유도하는 게 그의 최대 목표였던 것이다.
첫째 목표를 성사시키자면, 둘째 목표의 성취가 꼭 필요했다. 둘째 목표는 정·부통령 재선거를 실시하라는 국민적 요구를 물리치고 헌법 개정을 우선적으로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4·19 혁명은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 때문에 촉발됐다. 따라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으니, 3·15 부정선거를 무효화하고 재선거부터 실시하는 게 순리였다. 이 때문에 재선거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 다음에 개헌을 하자는 게 국민들의 요구였다. 정당한 선거로 선출된 새로운 정권의 주도 하에 새로운 헌법을 만들자는 게 당시의 정의였던 것이다. 이를 2016년 버전으로 바꾸면, 박근혜 정권을 심판하고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킨 뒤에 새로운 정부의 주도로 개헌을 추진하자는 논리가 당시에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재선거를 실시하게 되면, 4·19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자유당이 완전히 소멸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죄인으로 전락한 자유당이 참신한 대통령 후보를 내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승만을 다시 출마시킬 수도 없었다. 괜찮은 후보를 새로 영입한다 해도 국민들이 표를 줄 리는 만무했다.
참패가 확실한 선거전에 뛰어들었다가 정말로 참패를 당하면, 엄청난 후폭풍이 불어 닥칠 게 뻔했다. 4·19의 촛불로 이미 화상을 입은 자유당이 재선거에서마저 패배한다면, 선거의 승자가 자유당을 확실히 징벌할 게 뻔했다.
정국을 개헌모드로 전환시켜야 하는 임무이런 불상사를 방지하자면, 정국을 개헌 모드로 바꿔야 했다. 자유당이 여전히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현재의 국회가 개헌을 주도해야만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게 자유당의 판단이었다. 허정 대행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었다. 정국을 하루빨리 개헌 모드로 전환시켜 이승만과 자유당을 살리는 게 그의 미션이었다.
그런데 미국 국무부의 판단은 달랐다. 조속한 재선거로 민심을 달래고 한국 정치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유럽 경제회복과 아시아·아프리카 비동맹운동의 활성화로 미국의 영향력이 퇴조하던 1950년대 후반에, 미국은 한·미·일 삼각동맹을 출범시켜 동아시아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함으로써 세계적 차원의 패권 회복을 위한 기반을 다지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총리를 앞세워 1960년에 미일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한국과 일본의 동맹 체결을 추진했다. 이런 일을 처리하자면 한국 정치가 하루빨리 안정돼야 했다. 그러자면 한국민들의 요구대로 재선거를 빨리 실시하는 게 유리하다고 미국 국무부는 판단했다.
하지만, 미 국무부의 판단은 주한미국대사관의 판단이 바뀜에 따라 함께 바뀌고 말았다. 미국대사관의 판단이 바뀐 것은 자유당 사람들의 로비 때문이었다. 자유당 정치인들은 '한국 정치를 하루빨리 안정시키려면, 조속한 개헌을 통해 이승만 체제를 청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개헌을 한 다음에 새로운 선거를 치르는 게 순리가 아니겠느냐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주한미국대사관이 1960년 5월 7일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그렇게 미국대사를 설득하는 사람의 대열에 허정 권한대행도 있었다. 이날 그는 월터 매카나기 미국 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지금의 국회가 개헌을 주도한 다음에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칙을 따지자면 재선거를 실시한 뒤에 개헌을 하는 게 맞지만, 그렇게 하면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의 열기를 틈타 선거 국면에 뛰어들 수 있다'는 게 허정의 주장이었다. 미국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레드 콤플렉스를 활용해서 미국대사를 압박한 것이다.
허정과 자유당의 이 같은 로비의 결과로,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를 설득하고 국무부는 새로운 방침을 내놓게 된다. 한국에서 선거보다는 개헌이 먼저 추진되도록 한국을 움직이자는 쪽으로 미국의 정책이 바뀐 것이다. 이렇게 해서 허정의 둘째 목표가 성취된다.
허정의 셋째 목표는, 개헌을 하되 그것이 내각제 개헌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대통령의 독재와 부패를 막을 수 있는 정부체제를 내놓는다면 국민들의 '촛불'이 저절로 사그라질 거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이렇게 하면, 이전부터 내각제 개헌을 통해 이승만을 제압하고자 했던 민주당의 요구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또 내각제 개헌을 하면, 자유당이 새로운 상황에 슬그머니 편승할 수도 있었다. 이승만이 몰락한 상황에서 새로운 대통령후보를 내놓기 곤란한 자유당의 입장에서는, 내각제 개헌을 해야만 그나마 미래를 기약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허정 한 사람만의 판단은 아니었다. 4·19 촛불의 열기 속에서 목숨과 지위와 재산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던 1960년판 새누리당의 판단이기도 했다.
허정은 세 가지 목표를 모두 이뤘다. 권한대행이란 지위를 이용해 정국을 개헌 모드로 바꾸고 기존의 국회가 개헌 정국을 주도하도록 함으로써 4·19판 촛불의 열기를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또 내각제 개헌을 성사시킴으로써 대통령 독재의 가능성을 막은 것처럼 보여주는 동시에, 민주당도 만족시키고 자유당이 부활할 가능성도 남겨놓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허정은 이승만과 자유당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 최소화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승만이 감옥이 아닌 하와이로 망명할 수 있도록 돕는 데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