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육지전 최초 승리 장군, 참수되다

경기도 양주시 해유령의 전첩비와 사당

등록 2016.12.22 09:23수정 2016.12.22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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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사당 충현사 왼쪽 뒤편)에서 본 해유령 전첩비의 모습
정면(사당 충현사 왼쪽 뒤편)에서 본 해유령 전첩비의 모습정만진

선조는 4월 30일 서울을 떠날 때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에 김명원(金命元), 부원수에 신각(申恪)을 임명했다. 그리고 다른 여러 장수들에게도 임무를 주어 왜군 방어에 나서게 했다.

김명원은 문관이었다. 당시 최고위직은 군사 직책도 모조리 문관이 차지했다. 전쟁을 대비해 조정은 군사 지식을 갖추고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으로 바꾼다면서 전라, 경상, 충청 3도의 감사를 교체했는데, 하삼도의 군사권을 쥔 경상감사 김수, 전라감사 이광, 충청감사 윤선각 3인도 모두 문관이었다.


조선군 도원수, 한강에서 싸우지도 않고 혼자 도주

도원수 김명원은 1천여 군사를 이끌고 한강 북쪽 높은 강둑에 진지를 구축했다. 5월 2일, 왜군이 몰려와 조총을 쏘아댔다. 2만 명이 넘는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의 왜군은 한강변을 뒤덮었다. 놀란 김명원이 엉뚱한 명령을 내렸다.

"무기를 모두 강물에 집어던져라!"

부원수 신각이 놀라 김명원을 가로막았다.

"무슨 말씀이시오? 무기도 없이 왜적과 싸운다는 게요?"


신각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김명원은 관복을 벗어던진 다음 주섬주섬 백성의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신각은 김명원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뭘 하시는 겝니까?"


김명원이 눈을 치켜뜨고 신각을 흘겨보았다.

"나는 연(輦, 임금의 가마)을 지키러 가겠소. 임금께 무슨 일이 생기면 나라가 망한단 말이오."

선조를 호위하러 가겠다는 말이었다. 신각은 어이가 없었다.

"임금의 가마는 도원수가 아니라도 지킬 사람이 많소."

하지만 말에 훌쩍 올라탄 김명원은 혼자 도주해 버렸다. 도원수만이 아니라 일반 군졸들도 이미 잔뜩 겁을 먹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판에, 대장이 민간인 옷으로 바꿔입고 달아나려는 꼴을 보였으니 병사들의 마음에 새삼스럽게 전투 의욕이 솟아날 리가 없었다. 그들 역시 대장의 명령에 따라 무기를 한강에 집어던지고 제각각 살길을 찾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사방으로 내달렸다.

종사관(부관) 심우정이 대장의 말고삐를 붙잡고 ""주상(主上, 임금)께서 서행(西幸, 서쪽으로 피란)하고 계시는 마당에 어찌 한강을 버리려 하십니까? 정 그렇다면 임진강을 지켜 그 이북 땅이라도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하고 애원했다. 하지만 종사관의 애원 섞인 이 말마저도 김명원에게는 도주를 합리화해주는 구실로 들렸다. 임진강은 한강보다 북쪽에 있는 강이므로 김명원이 도주하려는 방향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아마 김명원은 '그래! 임진강을 지켜야지!' 하고 대답했을 법하다.

너무나 황당한 일이라 어느 누구도 상황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군사들도 멍하니 바라보던 끝에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무관 출신인 부원수 신각은 몇 안 되는 잔류 병력을 이끌고 한성으로 들어가 전 유도대장(지금의 수도경비사령관) 이양원을 만났다.

 해유령 전첩비 옆으로 고개가 보이는 풍경
해유령 전첩비 옆으로 고개가 보이는 풍경정만진

신각은 이양원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이양원도 거느린 군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한양 서북쪽으로 가면 흩어진 군사들을 조금이나마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양주로 이동했다. 그때 마침 수병(手兵, 직접 데리고 다니는 약간의 병사)을 이끌고 한성을 지원하기 달려오던 함경도 남병사 이혼(李渾)을 만나 합세하게 되었다.

신각, 이양원, 이혼, 인천부사 이시언(李時言) 등은 장차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 중에 일부 왜적들이 양주 일대에 때때로 나타나 노략질을 일삼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정탐병을 보내어 적병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한 다음, 해유령(蟹諭嶺,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한꺼번에 몰살하기로 결의하였다.

노략질 나온 왜적들 섬멸했지만, 돌아온 건 죽음

5월 16일, 마을 노략질을 마치고 돌아가던 왜군 소부대가 해유령에 올랐다. 적들은 조선군의 공격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으므로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노략질한 포목과 그릇 등을 짊어진 놈, 반쯤 술에 취한 채 말 위에서 졸고 있는 놈, 무기는 수레에 던져놓은 채 맨손인 놈 등, 각양각색이었지만  적들은 하나같이 전투 태세는 아니었다. 적들이 고개 중턱에 들어섰을 때 신각의 호령이 떨어졌다.

"활을 쏘아라!"

사방에서 포위하고 있던 아군의 활에서 시위가 당겨졌다. 뜻밖의 기습과 요란한 함성에 놀란 말들이 마구잡이로 날뛰고, 화살이 날아와 제 몸과 말등에 퍽퍽 박히자 적병들은 지리멸렬로 땅바닥에 굴렀다. 아군 병사들이 칼과 창을 꼬나들고 달려나가 적병들을 무찌르기 시작했다. 대검을 휘두르며 질주하는 신각의 백마는 어느덧 피범벅이 되었고, 이혼의 철퇴 또한 제 색깔을 잃은 채 핏빛으로 붉게 변색되었다.

순식간에 적병 70여 명이 죽었다. 나머지 일부 적병들은 노략질한 물건들은 저 멀리 내던진 채 땅을 기고, 도랑을 헤치며 달아났다. 임란 발발 이후 조선군이 이룬 최초의 승전이었다.

 해유령 전첩지에 세워져 있는 현지 안내판
해유령 전첩지에 세워져 있는 현지 안내판정만진

신각은 평양으로 옮겨간 조정에 승전 보고서를 보낸 뒤 경기도 연천 임진강에 진을 쳤다. 한창 군사들을 조련 중이던 18일, 전쟁 감독관 격인 선전관이 말발굽에 불을 휘날리며 달려 왔다.

"신각은 어명을 받아라!"

신각이 선전관 앞에 엎드렸다. 여타 장수들과 군사들도 모두 모였다. 왜놈들이 국토를 짓밟은 이래 최초의 승전을 이루었으니 큰 상이 내릴 줄 믿었다. 대장이 임금으로부터 커다란 치하를 받으면 그 아래 장졸들에게도 공에 합당한 뭔가가 뒤따르는 법이다. 장졸들은 잔뜩 기대를 품은 채 조정에서 온 선전관을 바라보았다. 그때 엉뚱한 말이 선전관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이놈, 신각! 너는 나라의 어려움을 당하여 전하께서 부원수의 중차대한 임무를 맡겼다. 그런데 어찌 도원수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주하여 제 한 목숨만 도모함으로써 우리 장졸들이 모두 흩어지는 데 앞장섰단 말이냐? 너로 말미암아 200년 도성이 왜적에게 넘어갔다. 왕명을 무시하여 나라를 바람 앞의 등불로 만든 장수를 살려두고서야 국법과 군율이 온전할 수 없다. 네 놈 목을 베어 나라가 백척간두에 선 오늘날의 본보기로 삼으리라!"

모두들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강에서 부대를 이탈한 도원수 김명원이 평양 조정에 가서 '부원수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바람에 대패했습니다' 하고 신각에게 터무니없는 누명을 덮어씌웠을 줄이야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선전관의 호령을 들으며 신각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죄인을 꿇려라!"

선전관의 군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신각의 양 어깨를 짓눌렀다. 신각은 두 무릎이 땅속에 박히도록 꺾이면서 몸이 앞으로 허수아비처럼 쏠렸다. 순간, 선전관의 칼이 신각의 목 뒷덜미를 지나 다시 앞으로 휘날렸다. 시뻘건 피가 솟으면서 신각의 머리가 툭 앞으로 떨어져 땅으로 굴렀다. 신각 부대 장졸들의 비명이 하늘로 치솟았다.

신각의 장졸들은 처음에는 낭패감에 젖어 몸만 부들부들 떨었지만, 이내 부글부글 분노가 끓어올라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한 장수가 칼을 뽑아들고 앞으로 나서면서 외쳤다.

"내, 저 놈 선전관을 죽여 장군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동시에, 군사들도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맞소! 도원수도 도망치고 없는 상황에 혼자 남아 우리들을 이끌고 왜적을 소탕한 신각 장군을 누가 감히 죽인단 말인가? 원수를 갚자!"

선전관은 '감히 어명에 저항하느냐?' 따위의 호통을 내지를 엄두도 못낸 채 황급히 도망쳤다.

 해유령 전첩비
해유령 전첩비정만진
그 시각, 왜군 70여 명을 죽이고 연천 임진강변에서 군사 훈련을 하고 있다는 신각의 보고서가 뒤늦게 평양 조정에 당도했다. 조정에서는 황급히 다른 선전관을 임진강으로 보냈다. 하지만 이미 신각은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원혼이 되어 허공을 떠돌고 있는 처지였다.

그 후, 김명원은 아무런 벌도 받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임진강 방어선을 지키는 총책임자의 지위를 지켰다. 그때는 명칭도 더 화려해져서 그냥 도원수가 아니라 팔도 도원수라는 감투가 되었다. 물론 임진강 방어선은 왜군에게 처참하게 무너졌다.

몇 달 뒤 도원수 자리를 이항복의 장인 권율에게 물려준 김명원은 호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를 거쳐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병조판서를 역임했고, 병조판서를 이항복에게 물려준 뒤에는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이항복이 영의정이 된 때에는 그의 추천에 힘입어 우의정 자리에 올랐고, 1601년에는 좌의정으로 더 올라섰다.

신각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의 부인 정씨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해유령 답사는 파주에서 접근하면 좋다

해유령 전첩지에 가는 경로는, 양주에서 파주로 접근하는 것보다 파주시 광탄면 쪽에서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로 넘어 가는 길이 더 추천할 만하다. 이유는 두 가지로, 첫째는 이 방향이 신각을 비롯한 조선군들의 임진왜란 당시 행군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적들의 행군로를 답습할 까닭은 없을 것이다.

둘째는, 파주에서 양주로 넘어가는 길에 진동하는 전쟁의 냄새를 맡기 위해서이다. 이 길을 가다 보면, 전차 등 전쟁용 차량들의 통행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해둔 군사 시설을 해유령 턱밑에서 만나게 된다. 도로 양옆에 성곽 같은 콘크리트 담장이 가설되어 있고, 자동차들은 그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 흡사 싸움터에 들어온 듯한 묘한 기분, 마음이 문득 서늘해지는 기운이 온몸을 휩싸고 돈다. 임진왜란 당시 해유령 일대에 매복하기 위해 이 길을 걸었던 우리 조상들도 지금과 같은 피와 죽음의 느낌을 받았으리라.

 해유령으로 넘어가는 고개 초입에 세워져 있는 군사 시설은 이곳이 오랜 옛날부터 중요한 전투 지점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해주는 듯하다.
해유령으로 넘어가는 고개 초입에 세워져 있는 군사 시설은 이곳이 오랜 옛날부터 중요한 전투 지점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해주는 듯하다.정만진

고개를 넘으면 해유령 전첩비가 나타난다. 작은 주차장이 있고, 마당 끝에 사당 충현사(忠顯祠)가 있다. 충현사는 신각 장군을 제사 지내는 공간이다. 현지 안내판을 읽어 본다.

'해유령 전첩지
경기도 기념물 39호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부흥로 411

<징비록>의 신각 관련 기록


(전략) 김명원은 임진강에서 올린 장계에 "신각이 제멋대로 다른 데로 가는 등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썼다. 우의정 유홍이 그대로 임금에게 보고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신각을 처형하기 위해 선전관을 파견했다.

(중략) 신각은 비록 무인이었지만 청렴하고 신중한 인물이었다. 예전에 연안부사로 있을 때에는 성을 쌓고 해자를 판 후 무기도 충분히 마련해 놓았다. 뒷날 이정암이 연안성을 굳게 지키자 사람들은 그를 두고 신각의 공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 인물이 아무 죄도 없이 죽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아흔이 넘은 노모가 계셨으니 이야기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애통해 했다.
해유령은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에서 파주시 광탄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임진왜란 때 육지 싸움으로는 최초로 승리를 거둔 전첩지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부산으로 침입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서울까지 거침없이 침입해 오자 선조는 개성으로 피란을 떠났으며, 수도를 지키는 부대와 전시에 군대를 통솔하던 도원수 등이 도성과 한강을 포기한 채 물러나고 말았다.

이때 부원수 신각 장군이 지휘하는 군사들은 왜군의 선봉 부대를 맞이하여 후퇴하였던 유도대장 이양원의 군대와 함께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적군 70여 명을 죽이고 임진왜란 최초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러나 승리를 이끌었던 신각 장군은 모함으로 양주에서 참살당하게 되는데 뒤늦게 조정에서 선전관을 급히 보내 형의 집행을 중지하고자 했으나 이미 형이 집행된 이후였다.

이곳에는 당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97년에 세운 전첩비 1기와 신각 장군을 기리기 위해 1991년에 세운 충현사가 있으며, 매년 5월 이곳에서 추모 제향을 지낸다.'

전첩비로 올라가는 계단 왼쪽에 자그마한 비석이 있다. 검은 빗돌에 무엇인가 새겨져 있다. 해유령 승리의 공적을 기념하여 세운 해유령 전승 기공 사적비(蟹踰嶺戰勝紀功史績碑)이다. 빗돌에 사방으로 새겨져 있는 본문을 읽어본다.

 임진왜란 약사와 해유령 전투 내력이 새겨져 있는 기적비, 사당 왼쪽(전첩비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있다.
임진왜란 약사와 해유령 전투 내력이 새겨져 있는 기적비, 사당 왼쪽(전첩비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있다.정만진

'(전략, 전문은 이 기사 끝에 첨부) 부원수 신각은 임진강 방면으로 도주하는 도원수 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도성 북쪽 양주에 머물며 병사들을 수습하는 중에 때마침 군사를 이끌고 내려온 함경병사 이혼과 양주 장수원 등에서 전투를 치르며 북상해 온 인천부사 이시언의 병력을 합쳐 비로소 전투가 가능한 대오를 편성하고 양주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한편 도성을 점령한 왜적은 평양과 함흥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먼저 선발대를 편성하여 양주로 보냈는데 이들은 양주 일대를 약탈하며 음력 5월 16일(양력 6월 25일) 이곳 해유령에 도착하게 된다. 적의 움직임을 면밀히 추적하던 조선군은 고개 좌우에 은밀히 매복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고개를 넘는 왜적을 급습하여 적병 70여 명을 한 자리에서 몰살하였다. 왜란 발생 이후 육지에서의 거듭되던 패전을 비로소 극복하고 마침내 첫 승리를 거두는 감격적인 순간이었고 왜적이 접근한다는 소문만으로도 두려움에 떨며 무너지던 조선군이 우리도 왜적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의미있는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이 뜻깊은 승전이 참으로 어이없는 참변으로 이어졌으니 누군들 이 참혹한 사태를 진작이나 하였으랴? 한강과 도성 방어선이 한꺼번에 무너졌다는 보고를 들은 국왕 선조가 측근 한응인을 파견하여 패전을 질책하자 다급해진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 방어 실패의 원인이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무단으로 이탈한 부원수 신각에게 있다고 책임을 전가하였고 조정에서는 우의정 유홍의 주도로 신각을 처형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해유령 전투 이후 함경도로 진군하는 왜적을 막기 위해 대탄(大灘)에서 물러나와 방어진을 치고 있던 신각은 억울한 참형을 당하고 말았다.

(중략) 신각 장군의 아내 또한 남편의 시신을 수습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집에는 신각이 노심초사 걱정하던 90 노모만이 세상에 홀로 남는 참혹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중략) 신각과 함께 싸운 함경병사 이혼은 신각의 억울한 죽음에 실망하여 군사를 물려 함경도로 돌아갔으나 국경인鞠景仁 등 반역자들에 의해 함경도 전체가 왜적의 손에 떨어질 때 역도들의 손에 죽었고, 유도대장 이양원 역시 의주에 피란해 있던 선조가 다시 요동으로 건너간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탄식하며 8일간 단식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으니 이 또한 가슴 시리도록 참혹한 일이었다. (하략)'

 신각 장군을 제사 지내는 해유령 아래 사당 충현사
신각 장군을 제사 지내는 해유령 아래 사당 충현사정만진

신각이 터무니없는 이유로 참형을 당하고, 그의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90 넘은 노모만 집에 남고, 선조가 명나라로 망명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양원이 피를 토하고 죽고, 이혼이 왜적들과 결탁한 반란군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빗돌에 새겨져 있는 해설문의 '누군들 이 자리에 서면 그 마음 숙연해지지 않으랴'라는 표현처럼,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토록 처참하게 왜란의 세월을 보낸 분들을 기려 사당이 세워지고, 또  전첩비가 건립되었구나!

전첩비 앞으로 다가선다. 몇 개의 계단 위, 사당 뒤에서 20보 가량 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전첩비인데도 왜 이렇게 발걸음이 무거운가. 육지전 최초의 승리를 일궈낸 빛나는 전첩지인데도 무엇 때문에 내 마음은 이토록 어두운가......

<해유령 전승 기종 사적비> 비문 전문


단군 성조(聖祖, 성스러운 시조)께서 거룩한 나라를 여신 후 누천년(累千年, 여러 천년)을 지나는 동안 아름다운 강토를 노리고 침범해 온 외적(外敵, 외국 침략군)의 무리가 그 얼마였던가? 그러나 선조들은 그때마다 조국 수호의 성업(聖業, 성스러운 일)에 기꺼이 한몸을 던져 결연히 이 땅을 지켜냈으니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지극한 평화와 눈부신 번영은 온전히 그 헌신의 아름다운 대가(代價)요 풍요로운 열매이리라.

우리 민족이 극복해낸 그 숱한 외침 중에서 왜란(倭亂, 임진왜란)처럼 참혹한 수난은 없었다. 왜적은 척박한 땅에 문명을 전해준 은혜를 외면한 채 단기 3925년(1592년) 4월 13일 침략의 칼끝을 이 땅에 들이밀었다.

이 땅과 백성이 처참히 유린되는 참혹한 병화(兵禍, 전쟁의 피해) 속에서 충의(忠義, 충성과 의리)의 의사(義士, 의로운 인물)들은 눈물겨운 헌신과 희생으로 사직과 국토를 온전히 보존하였으니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들은 곳곳에서 흉적을 몰아내고 이순신은 왜적의 함선들을 모조리 푸른 물결 아래 쓸어 넣었다.

자신이 죽을 자리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나라를 위해 의연히 한몸을 바친 충신들의 빛나는 업적은 오늘도 해와 달처럼 휘황하거니와 이곳 양주 해유령에도 왜적과 싸워 승리를 거둔 충신들의 눈부신 활약이 있어 그 남긴 자취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 더욱 역력히 우리의 가슴에 사무치니 후손된 누군들 이 자리에 서면 그 마음 숙연해지지 않으랴!

임진년 4월 14일 왜적이 날카롭고 서슬 푸른 기세로 들이닥쳐 부산 동래가 함락되고 이어 4월 28일 충주 방어선마저 무너지자 국왕 선조(宣祖)는 4월 30일 정처 없는 피란길에 오르고 왜적의 잔인한 약탈과 살육의 소문에 상하 군민(軍民, 군인과 민간인) 모두는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저항의 의지를 상실한 채 극단의 공황 상태로 빠져들었다.

국왕 선조는 김명원을 도원수로 신각을 부원수로 삼아 한강 방어선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고 이양원에게는 유도대장이 되어 한성 한양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거침없이 밀려오는 수 만 명의 왜적에 비해 이에 맞설 우리의 병력은 이미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5000명에 불과한 상황에서 도원수 김명원이 부원수 신각의 적극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먼저 진지를 벗어나자 전의를 잃은 도성 방위군은 왜적이 미처 한강에 당도하기도 전인 5월 2일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한강 방어선을 속수무책으로 포기한 부원수 신각은 임진강 방면으로 도주하는 도원수 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도성 북쪽 양주에 머물며 병사들을 수습하는 중에 때마침 군사를 이끌고 내려온 함경병사 이혼과 양주 장수원 등에서 전투를 치르며 북상해 온 인천부사 이시언의 병력을 합쳐 비로소 전투가 가능한 대오(隊伍)를 편성하고 양주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한편 도성을 점령한 왜적은 평양과 함흥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먼저 선발대를 편성하여 양주로 보냈는데 이들은 양주 일대를 약탈하며 음력 5월 16일(양력 6월 25일) 이곳 해유령에 도착하게 된다. 적의 움직임을 면밀히 추적하던 조선군은 고개 좌우에 은밀히 매복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고개를 넘는 왜적을 급습하여 적병 70여 명을 한자리에서 몰살하였다. 왜란 발생 이후 육지에서의 거듭되던 패전을 비로소 극복하고 마침내 첫 승리를 거두는 감격적인 순간이었고 왜적이 접근한다는 소문만으로도 두려움에 떨며 무너지던 조선군이 우리도 왜적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의미있는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이 뜻깊은 승전이 참으로 어이없는 참변(慘變, 비참한 사고)으로 이어졌으니 누군들 이 참혹한 사태를 짐작이나 하였으랴? 한강과 도성 방어선이 한꺼번에 무너졌다는 보고를 들은 국왕 선조가 측근 한응인을 파견하여 패전을 질책하자 다급해진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 방어 실패의 원인이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무단으로 이탈한 부원수 신각에게 있다고 책임을 전가하였고 조정에서는 우의정 유홍의 주도로 신각을 처형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해유령 전투 이후 함경도로 진군하는 왜적을 막기 위해 대탄(大灘)에서 물러나와 방어진을 치고 있던 신각은 억울한 참형(斬刑, 목이 잘리는 형벌)을 당하고 말았다.

신각을 처형하기 위해 선전관이 출발한 그날 오후 신각이 올린 전승 보고서와 함께 획득한 왜적의 머리 70여 개가 도착하자 비로소 진상을 파악한 선조는 급히 처형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선전관이 당도하기 전 해유령 전승의 지휘관 신각은 이미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였다. 1592년 음력 5월 19일 해유령의 승전고(勝戰鼓, 승리의 북소리)가 울린 지 불과 사흘 후의 일이다.

신각 장군의 아내 또한 남편의 시신을 수습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집에는 신각이 노심초사 걱정하던 90 노모만이 세상에 홀로 남는 참혹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신각은 강화와 경상도의 수사(水使, 수군 지역 대장)를 역임하였고, 일찍이 황해도 연안 고을에 부임하여서는 성내에 우물을 깊이 파고 각종 무기를 많이 비축하여 이로써 후일 이정암(李廷馣)이 연안에서 왜적 3000여 명을 도륙하는 토대를 미리 마련하기도 하였던 지혜로운 명장이었다.

신각과 함께 싸운 함경병사 이혼은 신각의 억울한 죽음에 실망하여 군사를 물려 함경도로 돌아갔으나 국경인(鞠景仁) 등 반역자들에 의해 함경도 전체가 왜적의 손에 떨어질 때 역도들의 손에 죽었고, 유도대장 이양원 역시 의주에 피란해 있던 선조가 다시 요동으로 건너간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탄식하며 8일간 단식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으니 이 또한 가슴 시리도록 참혹한 일이었다.

피 흘린 충신들의 사적이 낱낱이 밝혀지매 여기 피 어린 해유령 언덕에 서기 1977년 유생(儒生,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 김주현(金周鉉) 선생과 지역 유림 및 뜻있는 이들이 이를 기려 함께 탑과 비를 세우고 그 후 충현사(忠顯祠)를 지어 향화(香火, 제사의 향불)를 올렸다.

이를 더욱 선명히 하고자 해유령전승보국충신숭모사업회의 조태훈(趙泰勳) 회장을 비롯한 제현이 뜻을 모아 글을 다듬고 최형국(崔炯國) 박사의 감수를 받아 정성껏 사적비를 세우니 이로써 님들이 이루어 낸 눈부신 승리의 영광은 온누리에 뚜렷해지고 그 남긴 자취는 만대에 영원하리라.

후손들이 시절을 따라 고개 숙여 정성 어린 향(香)을 사르리니 충혼(忠魂, 충성스러운 영혼)들이시여, 평안히 쉬시며 부디 이 나라와 자손을 축복하시어 속히 통일의 대업(大業, 큰일)을 이루고 만방(萬邦, 세계)에 우뚝 솟아 번영하도록 도우소서.

단기 4348년 서기 2015년 12월
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홍정덕(洪晸悳) 삼가 지음
한국서예박물관 관장 양택동(梁澤東) 삼가 씀
해유령전승보국충신숭모사업회 건립


#해유령 #신각 #이양원 #이시언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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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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