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캠핑촌 모습
노순택
만나는 사람마다 입을 모아 / 민주화가 잘되어간다고 그러네 / 어떻게 잘되어가느냐고 / 구체적으로 좀 말해달라고 그러면 / 하나같이 입을 열어 대답해주네 // 청와대도 개방하고- / 각하란 호칭도 없애고- / 장관 임명장도 서면만으로 하고- / 국무회의 같은 것도 원탁에서 하고- // 만나는 사람마다 입을 모아 / 공산권에도 자유의 물결이 일고 있다고 그러네 /어떻게 일고 있냐고 / 구체적으로 좀 말해달라고 그러면 / 하나같이 입을 열어 대답해주네 // 디스코장도 생기고- / 청바지를 입고 청춘남녀가 연애도 하고- / 여성들은 허벅지까지 드러난 패션쇼도 하고- / 사기업도 생기고 시장경제도 도입하고- // 벗이여 닫힌 사회의 대중은 열린 사회의 대중을 모른다네 / 그들이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지배자들이 연출하는 텔레비전 속의 연극뿐이라네 / 그들이 알고 있는 자유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그들이 각색한 연극 대본뿐이라네- 김남주 <연극> 전문항쟁이라고 한다. 혁명이 있었다고 한다. 7차에 이른 '비상국민행동'(아래 퇴진 행동)에 연 인원 900만 명의 사람들이 광장으로, 거리로 나섰다. 단군 이래라는, 건국 이래라는, 유사 이래라는 수많은 기록들이 갱신되었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이 바뀐 것인가. 오늘(19일)로 46일째 그 역사적 광장의 한복판인 광화문 광장에서 24시간 텐트 노숙 농성을 하며 살고 있지만 나는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탄핵 이후 바뀌지 않는 상황 때문이다. 탄핵 이후 마지막 시간 벌기에 성공한 박근혜와 그 공범 부역자들이 아직 태연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와 청와대는 탄핵 이유가 전혀 없다고 강변하고, 친박은 다시 원내대표 선거에서 승리했다. 최순실은 혐의 내용 전부를 부인하고, 국회 출석조차 거부했다. 박근혜의 대표 공범이자 검찰-법원 사유화의 몸통이었던 황교안이 버젓이 '제2의 박근혜'를 행세한다. 아무런 일 없었던 듯 각종 '박근혜표 정책'들을 중단 없이 이어나가겠다고 한다.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들은 이제 그만 촛불을 끄고 차분하게 헌재 판결을 기다리라고 한다.
'항쟁' 내내 광장의 뒤편에서 정략적 사고로 헛발질만 하던 야권 역시 탄핵 가결 이후 광장의 역동성을 다시 부정하고 의심하며 재빠르게 다시 '질서 있는 퇴진'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간 수고들 했으니 촛불을 끄고 광장을 비우라고 한다. 의회와 기존 법 질서에 모든 걸 맡기고 다시 TV 시청자로 돌아가라는 말일 수 있다.
여야정 협의체를 꾸려 대표적인 공범부역자 집단인 황교안 직무대행 체제와 내각을 인정하자 한다. 국정조사는 맥없이 진행되고, 가장 급선무인 '적폐청산 특위'를 통해 박근혜표 정책들과 악행들을 근본적으로 바꿔나갈 생각은 없이 정세의 교란 요인일 수밖에 없는 '개헌특위'를 만들고, 위원장을 새누리당에게 주었다. 광장의 대리인을 자임하는 '퇴진행동' 대표단의 면담 요구는 거절당했다. 그러다가 지난 주말 광장의 노여움이 아직 남아 있음을 확인하자 재빨리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만나자고 했다 한다.
이렇게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가 버젓이 살아 있고, 다시 살아나는 현상들이 '혁명'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무색하게 한다.
광장 역시 위태롭다. 많은 이들이 탄핵 이후, 광장은 최선을 다했지 않느냐는 생각, 그간 수고했으니 헌재 판결을 기다리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 날씨도 추우니 쉬어가자는 생각, 법적인 절차에 따르는 수밖에 별 다른 개입 방법이 없지 않느냐는 생각, 야권과 협력해 몇 가지 당면 요구라도 관철시키는 것이 최선 아니겠는가 등의 생각이 겹치며 퇴진 정국의 가장 큰 축이었던 광장의 직접 민주주의 장이 급속도로 위축될 수 있다는 암묵적 판단들이 확산되고 있다.
광장을 다른 차원에서 대리하고 있는 퇴진행동 역시 '즉각 퇴진', '황교안과 장관들 사퇴', '적폐청산' 등 기조는 바르게 잡고 있지만, 보수적인 의회와 정치권 공방으로 광장의 힘이 수렴, 약화되지 않게 하기 위한 좀 더 적극적인 행동 마련에 특별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광장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렇게 여전히 긴장된 과정 속에서 '광장'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가. 문화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얼굴과 당만 바뀌는 가면극 놀이의 위선과 허위를 찢어내야 한다. 박근혜로 대표되는 구태와 부정, 불의가 다시는 발붙일 수 없는 새로운 윤리와 가치관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향한 '항쟁'과 '혁명'은 아직 채 시작도 못했다는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박근혜와 비선실세들에 대한 분노로 열렸던 광장이, 박근혜 이후 새로운 한국사회의 구성이라는 대안의 혁명으로 진화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각종 문화 행동이 볼거리와 재미를 제공하는 일이 아니라, 시대의 본질을 폭로하고, 이후에 대한 꿈을 형상화하는 역할로 자리매김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수구보수재벌동맹과 보수적인 여의도 정치 외에 광장의 직접 민주주의 운동이 더 강화될 수 있는데 마중물 역할이 무엇일지를 고민해야 한다. 1987년 항쟁의 뒤가 다시 노태우로 귀결되는 역사의 암흑이 재반복되지 않게 하겠다는 결의들이 필요하다.
실제 국민 대중들의 분노는 박근혜-최순실-재벌 게이트가 터지기 전부터 극에 차 있었다. 1100만 비정규직 시대, N포 세대로 대변되는 청년실업 200만의 헬조선, 끊이지 않는 하층계급들의 비관 자살로 얻게 된 자살공화국 명명, 정유라가 있기 전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흙수저' 사회에 대한 뿌리깊은 분노, 1%의 재벌독점특혜 사회에 대한 사회적 분노, 세월호 진상규명을 막아 온 세력들에 대한 분노, 전교조 법외노조화, 백남기 농민 공권력 타살,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구속,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작성 등 이어지는 민주주의 파괴, 민주주의 헌정 유린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
국정교과서 채택, 위안부 졸속 합의, 사드 배치 등 역사를 부정하고 한반도 평화를 뒤흔드는 것에 대한 분노들도 극에 달해 있는 상황이었다. 이 모든 분노들이 모여 더 이상은 우리 사회가 이런 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전국민적 항쟁으로 나아 왔다고 보는 게 맞는 평가라면, 이 항쟁의 요구 역시 궁극적으로는 박근혜로 대표되는 구 시대의 청산과 몰락 이후, 새로운 한국사회 구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