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푼 더 벌자고 서울로? 못할 짓

[제주와 서울, 그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중 28] 제주 이주 후, 돈을 잃은 대신 시간을 얻다

등록 2016.12.23 18:42수정 2016.12.23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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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


비록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 고온 현상이 지속돼 12월 21일 현재 밤 기온이 21℃까지 치솟고 계절을 착각한 몇몇 개나리들이 피어나고 있지만, 분명 크리스마스는 코 앞에 다가와 있다.

서울에 있을 때는 기껏해야 (24일 밤에만 1.5배로 비싸지는) 케이크 한 조각, 혹은 북적대는 인파로 가득한 레스토랑에서의 외식으로 성탄전야를 보내곤 했지만 제주의 크리스마스는 좀 달랐으면 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갖고 싶었다. 번쩍이는 황금색 볼이 주렁주렁 달린 트리를 만들어놓고 그 앞에서 아내와 맥주 한 잔을 즐기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트리와 장식을 구하기 위해 대형마트와 할인매장, 문구점 등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쓸 만한 물건은 모두 품절. 직원 분들에게 물어보니 진열해놓는 족족 물건이 빠져 구하기 힘들 거라고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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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크리스마스 트리를 갖고 싶었단 말이다. ⓒ 이영섭


일상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시간


가만 생각해보면 그랬다. 얼마 전부터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봉지씩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한 거 같다. 그리고 동네를 걷다 돌담 너머로 흘깃흘깃 쳐다본 이웃 집 거실에서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몇 번 본 거 같다. 아뿔싸, 나도 그때부터 서둘러야 했던 건가. 제주 사람들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열정이 이 정도로 높을 줄 몰랐던 게 패착이다.

제주에 와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돈, 정확히 말하면 높은 수입이 일상 속 행복의 크기와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서로 반비례하는지도 모르겠다.

은퇴할 나이가 돼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내려온 분들, 혹은 원래 가진 재산이 넉넉해 여유 있게 이주한 분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제주 이주민들은 육지에 비해 수입이 줄어든 경우가 많다. 전국 최하위권 임금을 감내하고 있는 회사원 대부분이 육지에 비해 절반 이하로 줄어든 월급으로 버티는 경우가 다반사고, 일부 잘 나가는 집을 제외하면 자영업자들의 수입 역시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단점을 커버해줄 커다란 장점이 존재한다. 수입은 적지만 시간적 여유가 도시사람들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가끔 예외는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제주 회사들은 야근이나 회식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다. 자영업도 마찬가지다. 도심지 내 대형 식당이나 판매점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가게들이 아침 늦게 오픈해서 오후 5시가 되면 문을 닫기 시작한다. 서울의 자영업자들은 꿈도 못 꿀 주 1회 휴식일도 대부분 철저히 지킨다.

처음에는 이런 점이 꽤나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육지에서 넘어온 분들이 운영하는 소위 맛집들은 오후 5시만 되면 칼 같이 문을 닫아버리는 데다, 동네 음식점들 역시 오후 6시 이후에는 대부분 영업을 종료하는 탓에 저녁에 외식을 하려면 메뉴 선택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렇다. 제주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시간을 일에 쏟아붓는 경우가 드물다. 장사가 잘 되든 안 되든, 업무를 다 처리했든 남았든 업무종료 시간이 되면 일과를 마무리하고 가정으로 돌아가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

그래서인 것 같다. 상대적으로 수입도 높고, 문화생활과 쇼핑을 즐길 인프라도 훨씬 잘 갖춰진 서울사람들보다 제주사람들이 더 열심히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이유, 서울에서보다 수입은 많이 줄었지만 가족들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의 횟수와 농도가 짙어지는 이유는 바로 이 개인적 시간의 여유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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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화초등학교 앞을 지날 때면 항상 만나게 되는 백구네 가족. 언제나 느긋한 자세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다 ⓒ 이영섭


당신의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인가

생각해보면 그렇다. 집 안에 작은 트리 장식을 해놓고 그 앞에서 온 가족이 케이크 한 조각씩 나눠먹는 데 드는 돈이라봐야 5만 원 내외면 족하다. 서울 사람들이 이런 시간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시간적 여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제주 사람들은 아직 그 정도 여유는 갖고 살아간다는 차이인 듯하다.

제주에 와서 내가 잃은 것이 돈이고, 반대로 얻은 것이 시간이라면 이 둘을 저울에 올려놓았을 때 과연 어느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까.

서울에서 제일 오래 살았던 동네, 오래 다녔던 직장을 기준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시간을 비교해보았다.

출·퇴근 : 서울 왕복 4시간(양천구 ↔ 판교) vs. 제주 왕복 1시간(구제주 ↔ 신제주)
장보기 : 서울 왕복 1시간(양천구 내 대형마트) vs. 제주 왕복 10분(농협 하나로마트)
외식 : 서울 왕복 2시간(양천구 ↔ 강남 혹은 종로) vs. 제주 왕복 30분(함덕 혹은 제주시내)
병원 : 서울 왕복 10분(양천구 동네 병원) vs. 제주 왕복 15분(삼화 지구 병원)

당장 출퇴근 시간만 비교해도 하루에 3시간 가량이 단축됐다. IT회사가 밀집해있는 판교로 출퇴근하던 시절, 평균 퇴근시간은 대략 오후 7시 정도였다. 6시에 업무가 종료돼도 바로 퇴근은 언강샘심. 이리저리 눈치를 보다 관리자급들이 저녁을 먹으러 자리를 비우는 오후 7시가 돼야 비로서 퇴근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후 7시께 회사를 빠져 나와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판교 지하철 역에 도착해서 강남역으로 향하는 신분당선에 탑승, 20분 정도를 달려 강남역에 도착한 후에는 다시 도보로 10분 정도 소요되는 환승 게이트를 거쳐 2호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언제나 인파로 가득한 2호선에 끼어 35분 정도 꾸벅꾸벅 졸다 보면 신도림역에 도착, 강남역 못지 않은 환승 인파를 뚫고 다시 10분에 한 대씩 다니는 지선으로 갈아타면 비로서 이 대장정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2호선 지선을 타고 몇 정거장만 참으면 내가 살던 동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다. 지하철 역을 빠져 나와 다시 집까지 도보로 10분이 소요되는데 이게 보통 오르막길이 아닌지라 한여름에는 와이셔츠가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이 나는 난코스였던 것이다.

이렇게 퇴근이라기보다는 고행에 가까운 과정을 거쳐 간신히 집에 도착하면 시곗바늘은 오후 9시를 넘어있기 일쑤였다. 대충 씻고 옷 갈아 입고 늦은 저녁을 먹고 나면 아무리 빨라도 오후 10시. 의미 없이 틀어놓은 TV 앞에서 30분 정도 꾸벅꾸벅 졸다 보면 하루가 마감됐다. 다음 날 오전 7시에 기상할 때까지 제발 회사에 아무 일 없길, 급한 일이 생겼다고 전화 오는 일이 제발 없기를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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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처럼 일만 한다는 말이 있건만 올레길에서 만난 이 소들은 그 말과 엄청난 거리감이 있는 듯하다. ⓒ 이영섭


제주 이주 후 내가 퇴근에 사용하는 시간은 차로 대략 30분 남짓이다(이것조차 제주 사람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먼 거리란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오후 6시 정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타고 30분 남짓 달리면 우리 집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다. 씻고 저녁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강아지들 산책 겸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와도 아직 오후 9시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남은 시간에는 어제 읽다 만 책을 계속 보거나, 이렇게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는 시간을 갖기도 하고, 가끔은 놓친 드라마와 영화를 실컷 보다가 늦게까지 잠을 설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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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긴 계절에는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나선 산책길에서 일몰을 만나기도 한다 ⓒ 이영섭


이렇게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의 값어치를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지, 돈과 시간 중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불과 수초 만에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이건 비교할 가치조차 없이 시간의 완승이다. 고작 몇 푼의 월급을 더 받기 위해 다시 예전의 그 생활로 돌아갈 수 있겠냐고 자문자답해보는 것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극히 개인적인 나만의 경험과 가치관에서 비롯된 결론이다. 행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돈과 시간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혹은 돈 없는 시간과 시간 없는 돈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정답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쯤은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지금 얼마나 값어치 있는 일에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가. 혹시 나 스스로나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한 푼 값어치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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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눈이 온 다음 날이면 제주 도민들은 눈썰매를 타기 위해 한라산을 오른다 ⓒ 이영섭


이런 고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도시 생활은 정신 없이 흘러갔다. 그 고민의 시점이 좀 더 빨랐다면 내가 쌓아 올린 행복의 누적수치도 지금보다 더 컸으리라. 그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제주이주 #1100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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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 : 제주, 교통, 전기차, 복지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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