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수 검찰총장(7년 6개월) 기록을 달성한 신직수 그리고 최장수 대법원장(10년 2개월)으로 기록된 민복기.
연합뉴스
그로부터 1년 뒤인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다음날,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도예종씨 등 8명에 전격 사형이 집행됐다. 박정희 정부는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고 유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시신을 화장시켜 버렸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InternationalCommission of Jurists)는 4월 8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그로부터 20년 뒤에 MBC는 판사 315명을 대상으로 '근대 사법제도 100주년 기념 설문조사'를 벌였다. 판사들은 인혁당 사건 재판이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이었다고 응답했다. 인혁당 사건은 30년만인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의 재조사가 이뤄져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인민 혁명 시도로 왜곡한 학생운동 탄압사건"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마침내 2009년 9월 사법부는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내란죄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라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인혁당 재판 = 사법살인' 등식이 통용될 만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런 재판'으로 기록된 인혁당 사건을 말할 때 기억해야 할 두 '법비'가 신직수(1927~2001년)와 민복기(1913~2007년)다.
박정희의 사단장 시절 법무참모를 지낸 인연으로 검찰총장, 법무장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신직수는 역대 최장수 검찰총장으로 7년 6개월 동안이나 재직했다. 민복기는 친일파 민병석(이완용의 사돈)의 아들로 일제 때부터 판사를 지내고 해방후 검사로 변신해 이승만 정권에서 검찰총장, 박정희 정권에서 법무장관과 대법원장을 지냈다. '법관 재임용제'로 사법부를 통제한 박정희 정권 시절에 그가 대법원장으로 두 번 재임한 10년 2개월은 법조 사상 최장수 기록이다.
두 사람은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뿌리인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때부터 관련돼 있다. 1차 인혁당 사건은 "6.3사태라는 박정희 정권 출범 이후 최대의 위기상황 속에서 학생데모의 배후를 밝히는 과정에서 발생한 공안사건"(국정원 과거사위 발표)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확대돼 정권퇴진 운동으로 번지자 1964년 6월 3일 계엄령을 선포해 시위를 진압했다. 이어 8월 중앙정보부(김형욱 부장)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혁당'을 적발해 도예종 등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은 수배 중에 있다"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사건을 송치받은 서울지검 공안부(이용훈 부장)는 20여 일 간의 수사 끝에 증거불충분으로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라고 기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남산의 돈가스'로 불린 김형욱 정보부장은 노발대발했다. 법무장관 민복기는 '상명하복의 검찰 기강을 세우기 위해 공소장에 서명을 거부한 검사에 대해서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김형욱 부장 밑에서 차장(1963년)을 지내고 검찰총장으로 부임한 신직수는 당직검사(정명래)를 통해 이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고, 이용훈-김병리-장원찬 검사는 사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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