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 묘비정철 묘비에 '정철은 유명조선좌의정'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물론 이는 정철에게만 적용된 용어가 아니다. 당시 조선 사회 모두의 관용적 표현이었다. '유명조선좌의정'은 대략 '명나라의 속국 조선의 좌의정'이라는 뜻이다.
정만진
좌해와 마찬가지 인식을 보여주는 어휘는 정철의 묘비에도 새겨져 있다. 묘비명은 정철의 대표 관직을 '有明朝鮮左議政(유명조선좌의정)'으로 소개했다. 유명조선은 명나라의 속국 조선이라는 뜻이다.
심지어 선조는 1601년 3월 14일자 <선조실록>에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직 명군의 은혜'라면서 '우리 장수들은 적장의 머리 하나 베거나 적진 하나 함락한 적이 없었다'라는 명언(?)까지 남겼다. 물론 선조의 말은 사실도 아니지만, 선조 본인은 국왕으로서 임진왜란에 대한 대비를 어떻게 하였기에 조선 장수들이 적장의 머리 하나 베지 못했다는 극언을 할 수 있었을까?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준비 실태류성룡의 <징비록>에 '그때부터 우리 조정에서는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라고 시작되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그때'는 일본에 갔던 통신사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 일행이 돌아온 1591년 1월 이후를 뜻한다. 그런데 이 대목은, 황윤길은 일본이 전쟁을 도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그 반대로 침략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당시 집권 세력인 동인(東人)이 서인(西人)인 정사 황윤길의 보고를 묵살하고 같은 동인인 부사 김성일의 견해를 채택함으로써 당시 조선 조정이 전쟁에 대해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다 하니 흔히 알려진 것과는 아주 다른 증언이다. 류성룡의 기록을 더 읽어보자.
'그때부터 우리 조정에서는 일본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경상감사에 김수, 전라감사에 이광, 충청감사에 윤선각을 임명하여 무기를 준비하고 성과 해자를 건설하도록 했다. 특히 경상도에 많은 성을 쌓고, (경북)영천·청도·대구·성주·안동·상주, (경남)진주·삼가·부산·동래 등지에는 병영까지 새로 만들거나 고치도록 했다. 국경 사정에 밝은 인물을 뽑아 남쪽 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방어를 맡도록 한 것이다.' 국경 사정에 밝은 인물을 뽑아 |
군사권을 가진 감사에 임명된 김수, 이광, 윤선각은 모두 문관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총사령관에 해당되는 도원수를 맡은 김명원도 문관이었다. 그 무렵만 해도 문관과 무관에 대한 차별이 심하여 중요 군사 직책도 최고위직은 모두 문관이 맡았고, 무관에게는 그 아래 자리가 주어졌다.
김명원 아래에서 부원수를 맡은 신각은 무관 출신이었는데, 김명원이 1592년 5월 2일 한강 방어를 포기하고 평양으로 떠나버리는 바람에 군대가 해산되었을 때 약간의 병사들을 모아 5월 16일 해유령(蟹諭嶺,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에서 약탈을 나온 왜적들을 기습, 조선 육군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신각은 이내 처형되었다. 김명원이 선조에게 '신각이 제멋대로 부대를 이탈하는 바람에 왜적을 막을 수 없었다'라고 허위 보고를 한 때문이었다. (신각과 해유령 전투에 대해서는 기사 '임진왜란 육지전 최초 승리 장군, 참수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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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로 성곽이 새로 잘 축조된 것은 아니었다. 1392년 건국 이래 200년 동안 큰 전쟁 없이 지내온, 즉 전쟁 준비와 관련하여 성 쌓기 등의 노동에 동원된 적이 없는 백성들의 불평불만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일본군이 무슨 수로 바다를 건넌단 말이오?류성룡도 <징비록>에 전임 성균관 전적(정6품) 이로(李魯)가 자신에게 "이 태평성대에 무슨 성을 쌓는단 말이요? 당치도 않소"라면서 "내가 살고 있는 (경남 합천)삼가 지방만 해도 앞에 정진 나루터가 가로막고 있어 왜적이 결코 뛰어넘을 수 없소.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무턱대고 성을 쌓는다며 백성들을 힘들게 하니 정말 답답한 일이오" 식의 편지를 보내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넓은 바다를 가로질러 쳐들어온 왜구들을 제대로 저지하지 못한 일도 많은데 가느다란 냇물로 막을 수 있다니 내가 더 답답했다. 그런데도 당시 사람들 중에는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았고,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홍문관도 비슷한 의견을 내놓았다.게다가 경상도와 전라도에 쌓은 성들도 규모만 커다랄 뿐 쓸모가 없었다. 본래 험한 산을 활용하여 쌓은 진주성은 방어 요새로 충분했는데, 성이 작다면서 동쪽 평지로 옮겨 새로 크게 짓는 바람에 (1593년 6월) 적의 침입을 받자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성은 규모가 작더라도 튼튼한 것이 가장 중요하거늘, 무조건 크게만 지어 낭패를 본 것이다. 이런 일은 전쟁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으로, 그 결과 나라의 힘이 한곳에 집중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병법 활용, 장수 선발, 군사 훈련 방식 등 모든 면에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전쟁이 발발하자 줄곧 지고 말았다.'전쟁 준비 소홀에 대한 류성룡의 증언은 계속 이어진다.
'임진년(1592) 봄에 신립과 이일을 파견해 변방을 돌아보도록 했다. 이일은 충청도와 전라도로 가고, 신립은 경기도와 황해도를 순시했다. 한 달이 지나 그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이 조사해 온 것은 고작 활과 화살, 창과 칼 따위뿐이었다. 군과 읍에는 문서로만 무기가 있을 뿐 실제로는 무기가 없는 상태였다.' 신립과 이일이 '국경 지대의 성곽들과 무기 준비 상태에 이상이 없다'라는 취지의 보고를 한 때는 4월 1일이었다. 일본군이 쳐들어 와 부산진성을 함락시키는 4월 14일로부터 불과 13일 전, 조선 조정은 그런 상태였던 것이다.
수군 해체 명령까지 내리는 선조와 당시 조선 조정그렇게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으로도 모자라 선조와 조정은 수군에 해체령을 내렸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바로 그날 <선조수정실록>에는 수군을 없앤다는 명령을 수사(水使)들에게 내려보낸 기사가 실려 있다. 기사는 '해도(海道, 바다를 끼고 있는 도)의 주사(舟師, 수군)를 없애고 장수와 병사들은 육지에 올라와 싸우고 지키도록 명했는데, 전라수사 이순신이 "수륙(水陸)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 하고 반대하여 호남의 주사만 홀로 온전히 남았다'라고 증언한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조선 지도부는 어째서 수군 해체령을 내렸을까? 그들은 '섬오랑캐들은 바다의 수전에 능숙한 반면 말을 타고 싸우는 기전에 서툴고, 우리나라는 기전에 장점이 있어도 수전에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적들이 전함으로 맞싸우지 않고 지는 체하며 그들을 육지에 끌어들인 다음 기병으로 공격하면 거의 물리칠 수 있다.(<세조실록>1457년(세조 3) 1월 16일)'라고 오판한 결과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까지 200년에 걸친 통일 전쟁을 하며 일본군이 쌓은 경험은 모두 육지전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요약하면, 선조와 조정은 수군 해체 명령을 내리고, 백성들의 불만이 높다는 이유로 성 축조 등을 사실상 포기하고, 군사와 무기도 준비하지 않는 등 거의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 직전 3년 내내 '정여립의 난'을 둘러싼 피바람에만 몰두해 있었다.
▲정여립이 서실을 차려놓고 동조 세력과 더불어 활쏘기 연습을 하는 등 활동 무대로 삼았던 천반산 아래 죽도마을 쪽에서 흘러내려오는 금강의 겨울 풍경
정만진
정여립은 1546년(명종 1)에 태어났다. 1570년(선조 2) 과거에 급제한 뒤 이율곡 등 서인들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아 세상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그런데 서인이던 정여립이 1584년부터 갑자기 집권 세력인 동인 쪽에 줄을 서버렸다. 그는 서인의 집중적인 미움을 받게 되었고, 선조로부터도 비난의 말을 들었다. 결국 그는 동인 세력의 강력한 천거에도 불구하고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선조실록>1585년(선조 18) 6월 16일 |
선조가 "정여립의 짓(이율곡을 헐뜯은 일)은 사람의 상식에 맞지 않기 때문에 내가 처음에는 떠도는 말이 아닌가 여겼는데, 뒤에 들으니 참으로 헛말이 아니었으므로 반측무상(反側無狀, 두 마음을 품고 함부로 행동함)한 자라고 전교(傳敎, 명령을 내림)하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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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정여립은 동인 내에서 변함없는 인망과 영향력을 누렸다. 특히 그의 명망은 전라도 일대에서 매우 높았다. 감사나 수령들은 다투어 정여립의 집을 찾았다. 그는 진안 죽도마을에 서실을 지어놓고 군사 조직 성격의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달마다 활쏘기 모임인 사회(射會)를 열었다.
대동계의 조직은 점점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589년 10월, 정여립과 대동계가 한강물이 꽁꽁 언 때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서울로 진격하기로 했다는 고발이 조정에 접수되었다. 조정이 체포령을 내리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집을 떠나, 평소 자주 머물렀던 죽도로 피신했다가 마침내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