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신라 화랑.
김종성
신라 화랑들, 정권 아니라 나라 위해 싸웠다 위작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신라 화랑들도 국내 정쟁에 가담한 사례가 있다. 드라마 <화랑> 속의 화랑들도 어느 정도는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예외였다. 대개의 경우, 화랑들은 정권이 아니라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드라마 <화랑>에 나오는 화랑들은 진흥왕 때인 6세기 중반의 사람들이다. 이들보다 1세기 뒤인 7세기 중반의 화랑들 중에서 후세에 오래도록 기억되는 이들이 있다. 동족인 백제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자신을 희생해 유명해진 점은 좀 그렇지만,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영웅적인 희생의 길을 택한 화랑 반굴과 관창이 바로 그들이다.
황산벌에서 벌어진 처음 4차례 전투에서 5만 명의 신라군은 5천 명의 백제군에게 4연패를 당했다. 그 전부터 신라가 압도적인 군사적 열세에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그다지 이상한 풍경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린 반굴과 관창이 적진에 뛰어들어 처참하게 희생된 것이 전세 역전의 계기가 되었다. 어린 종교 수행자들의 희생을 지켜본 성인 병사들이 죽기 살기로 달려들면서 전세가 일순간에 역전됐던 것이다. 반굴·관창의 희생은 민족사적 관점에서는 좀 그렇지만, 이를 발판으로 신라는 백제의 위협을 물리치고 국제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었다.
종교인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 전통은 고구려에도 있었다. 화랑과 비슷한 조의선인(皁衣仙人)이 고구려에도 있었다. 검은 의복(皁衣)을 입고 신선(仙人)의 길을 추구한다고 그렇게 불렸다. 이들 역시 종교적 수행과 무예 단련에 힘쓰는 '목회자'들이었다.
우리는 고구려와 당나라의 격전인 645년 안시성 전투를 기억한다. 이 전투는 우리 머릿속에서 양만춘 장군을 연상시킨다. 물론 양만춘이 공을 세운 건 사실이지만,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밑바탕에는 수많은 조의선인들의 희생이 있었다. 정규군이 아니라 종교인들의 활약이 승리의 원동력이었다.
먼 훗날의 고려 최영 장군이 그때의 역사를 언급했다. <고려사> 최영 열전에 따르면 그는 "당나라 태종이 우리나라를 공격했지만, 우리나라가 승군 3만 명을 출동시켜 그들을 격파했다"고 말했다. 최영이 말한 '우리나라'는 자기 시대의 고려가 아니라 그 이전의 고구려다. 그리고 승군은 조의선인이다. 한자 승(僧)은 불교 승려뿐 아니라 여타 종교 성직자들도 가리켰다. 조의선인들이 종교인 겸 전사였기에 승군이라 불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