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의 생일 선물

차량 사고 내고 그냥 가시라고 말한 어느 농군(農軍)

등록 2017.03.10 10:17수정 2017.03.10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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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생일을 잊고 살아 왔다. 바쁘게 달려 온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정녕 축하 받을 만한 일인가. 내가 축하 받을 만한 삶을 살아왔는가! 결혼을 하고 나서도 또 세 아이가 태어나서 커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생일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생일에 대해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은 SNS 때문이다. 어찌 보면 수혜로 보이고 또 달리 보면 그것의 반대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문명의 첨단이기(尖端利器)인 인터넷은 사람들의 속 내용까지 빼놓지 않고 알려 준다. 오늘 나도 페이스북, 카카오톡, 밴드, 문자 메시지 등으로 적지 않은 생일 축하 글을 받았다.

서울에 사는 한 집사님은 이상한 선물을 보내왔다. 나의 입장에선 이상한 것이지만 보통 사람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이다. 카카오톡으로 선물권을 보내 온 것이다. 그것도 파리바게트 고구마 케이크로. 그 집사님은 아이들 다 객지에 나가 있고 목사님 내외분만 계셔서 적적할 것 같아 변변치 않은 것 보낸다며 겸손해 했다.

​강의가 있는 날이어서 일일이 감사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그 중 한 카톡방에는 반응이 없는 나를 보고 "생일상 받을 시간도 없나 봅니다", "답글 빨리 올리세요" 등의 항의성(?) 글이 올라와 있었다. 쉬는 시간을 틈 타 두루뭉술 전체를 묶어서 감사 답글을 올렸다. 주신 사랑의 글들을 좋은 생일 선물로 생각하면서.

​오늘 아침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 교회 교인인 김 집사와 면사무소에 같이 가기로 약속을 했다. 일반적으로 농촌의 면(面)은 그 소재지 마을에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단위농협 등의 기관들이 모여 있는데 우리 면은 그렇지 않다.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일을 보기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면사무소는 우리가 사는 마을에서 10여 리 떨어져 있다. 농촌 길을 걸어서 가는 것도 쉽지 않고, 버스를 이용하려 해도 바로 가는 교통편이 없기 때문에 중간에 한 번 갈아타야만 한다. 이런 상황인지라 지난 주일 김 집사님은 4일 뒤인 목요일(그러니까 3월 9일인 오늘) 오전에 내 승용차로 면사무소엘 가기로 한 것이다.


​오전 9시가 채 안 된 시각이었다. 서류를 발급받아 면사무소 팩스를 이용해 병원으로 보내고 오는 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자동차에 올라 서서히 후진을 하는데 '꽈당!' 하는 소리가 났다. 뒤에 서 있던 타이탄 트럭과 부딪힌 것이다. 아니, 조금 전까지도 차가 없었는데 어느 새…. 정작 함께 일 보러 온 김 집사님이 어쩔 줄 몰라 했다.

​타이탄 트럭 운전자가 면사무소로 들어서려다가 발길을 되돌렸다. 구릿빛에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좋지 않은 일로 만났지만 호감이 가는 얼굴. 트럭에 실려 있는 기구들로 보아 농군(農軍)임이 틀림없었다. 접촉한 부위가 조금 우그러져 있었고, 문을 열고 닫을 때 나지 않아야 할 뻑뻑한 소리가 났다.


​"정비소에 가서 펴 달라고 하면 될 거에요."

​이런 우문(愚問)을 던진 내게 그의 현답(賢答)이 돌아 왔다.

​"그냥은 안 해 줄 것 같은데요."

​나는 움찔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 제 전화번호를 적어 드릴 테니까 수리하고 연락 주세요. 제가 가서 계산하겠습니다."

​필기도구를 찾기 위해 자동차 문을 열었다. 그때 김 집사님이 자기 일로 목사님이 사고를 냈다면서 혼잣말을 했다. 그 소리를 농군이 들었나 보다.

​"아니, 목사님이세요? 도리어 제가 죄송합니다. 주차하고 있는 자동차에 아무도 안 계신 줄 알고…. 발급해 놓은 서류만 받아 오면 되었거든요. 잠깐이라는 생각만 하고 주차 공간에 차를 대지 않은 제 불찰도 없지 않습니다. 제가 알아서 수리하겠습니다. 그냥 가세요. 저도 교인입니다."

​마음이 울컥했다. 비상식이 상식을 제어하고 비정상이 정상을 지배하려는 세태에 그의 말은 나에게 정말 신선(新鮮)하게 다가왔다. 이런 경우 피해자라며 떼를 쓰고 트집을 잡아서 곤란을 당할 때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얼마 전 차량 접촉으로 인해 곤혹을 치른 한 지인(知人) 목회자 이야기가 떠올랐다.

​집 앞 도로가 공사 중이었다. 길모퉁이에 차량 한 대가 비스듬히 서 있었다. 그 목회자가 운전하던 승합차가 커브길을 돌다가 주차되어 있는 그 승용차와 살짝 스쳤다. 내려서 살펴보니 다행히 거의 표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양심상 미안하다는 인사라도 하는 것이 도리인 것 같아 차량에 붙어 있는 번호로 전화를 넣었다.

​잠시 후 40대 초반의 젊은이가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나왔다. 표는 나지 않지만 살짝 스쳐 미안한 마음에 전화를 했다고 인사했다. 젊은이는 대뜸 외제 차량인 것 아시죠? 라며 원래 길게 흠이 나 있는 것이긴 하지만 목사님의 차량이 스쳐 지나간 탓에 깊이가 더 해졌다며 보험 처리를 할 건지 아니면 스스로 해결할 건지 물어왔다고 한다.

​목사님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상황이 전개되어 당혹스러웠다. 보험처리를 할 요량으로 회사에 사고 접보(接報)를 하니 잠시 후 보험회사 직원이 나왔다. 소위 피해 차량 소유주인 젊은이와 짧지 않은 시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보험 처리하면 간단할 걸 무슨 얘기가 저렇게 길까 혼자 생각했다. 한참 뒤 직원이 와서 권했다.

​"보험처리하면 외제 차 수리에 5백 만 원 정도 견적이 나오는데, 목사님이 직접 처리하면 2백 만 원에 합의를 봐 주겠답니다. 당장 부담은 되겠지만 보험 수가 인상 등을 고려할 때 2백 만 원으로 합의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멀리 볼 때 유리하거든요."

​양심대로 처신하려다 덤터기를 쓴 격이 되었다며 씁쓰레했다. 목회자로서 양심껏 살려 하지만 그런 가운데 받는 상처는 한두 번이 아니라며 한숨짓는다. 그 중고 외제차는 흠이 있는 그대로 잘도 돌아 다녔고, 또 좁은 골목길에 비스듬히 주차되어 있곤 했다.

​그런 예에 비할 때 오늘 나는 그 농군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은 셈이 된다. 이 세상은 선인(善人)과 악인(惡人)들이 섞여 살고 있다. 정도의 강약은 있겠지만 이것은 그래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도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훨씬 많다는 믿음은 위로가 된다. 오늘 나에게 선을 행한 농군처럼. 의외의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하니 고맙기 그지없다.

#생일선물 #SNS축하인사 #축하 케이크 #차량 사고 #농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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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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