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교육기관 회원들은 팽목항 방파제에서 노란우산으로 ‘사람먼저’라는 글자를 만들었다. 이를 서영석 사진작가가 드론으로 촬영했다.<사진제공 노란우산 프로젝트>
시사인천
아픈 상처가 있다. 반드시 아물어야만 하는 상처다. 그 상처가 내 상처는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아프지 않지만 아프다. 다른 사람의 상처지만 공감하기에 아프고, 다른 사람의 상처이기에 쉽게 잊을 수 있어서 아프지 않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어느덧 3년이 되어간다. 3년 동안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의 상처는 단 한 번도 아문 적이 없다. 그들의 짓무른 살갗을 정부는 방치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곪아가는 상처는 세상에 그대로 노출됐다. 누군가는 그 상처와 함께 했고, 누군가는 잊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점점 무뎌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기, 망각을 거부한 사람들이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잊지 않기 위해, 기억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노란 리본과 함께 거리로 나서고 있는 노동자교육기관 회원들이 그들이다.
지난 1월 9일 세월호 참사 1000일을 맞아 인천 백운역에서 추모행사를 연 이들은 세월호 참사 3주년을 한 달여 앞둔 3월 4일, 팽목항으로 향했다. 그 길을 나도 동행했다.
새벽 5시, 희붐한 하늘빛이 세상을 비추기 전부터 100여명이 부평공원으로 모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가방에, 가슴에 노란 리본을 매거나 팔목에 노란 팔찌를 차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선연히 빛나는 노란빛깔이 어둡고 차가운 새벽 공기를 밝혔다.
5시 20분, 버스는 출발했다. 어스름을 뚫으며 줄달음치는 버스 안에서 빼곡하게 김이 서린 창문을 바라보았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바깥풍경이었지만 가만히 들여다볼수록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또렷이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오전 10시 30분, 팽목항에 닿았다. 버스에서 내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녹색 펜스에 달려있는 헤지고 빛바랜 노란 끈들이었다. 포기할 수 없기에 끊어질 수 없는 많은 소망들이 바람에 흩날리면서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겨 분향소로 향했다. 분향소 입구 벽면에는 '차가운 바다 속에 아직도 사람이 있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실종자 9명의 사진과 이름이 걸려있었다. 나는 그 이름들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단원고 2학년 1반 조은화양, 단원고 2학년 2반 허다윤양, 단원고 2학년 2반 남현철군, 단원고 2학년 6반 박영인군, 단원고 교사 고창석님, 단원고 교사 양승진님, 권재근님과 아들 혁규군, 이영숙님..."
"하루빨리 304번째까지 이름을 찾기를"분향을 마치고 분향소 옆에 있는 자그마한 건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여전히 팽목항을 지키고 있는 세월호 희생자 단원고 2학년 9반 진윤희양의 삼촌 김성훈씨와 아직 바다 속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2학년 1반 조은화양의 어머니를 만났다.
주검이 돼서야 바다 위로 올라올 수 있었던 희생자들 가운데 단원고 여학생 90%를 팽목항 임시안치소에서 직접 확인했던 김성훈씨는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올라온 아이들은 자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고,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삼선 아디다스 트레이닝복도 입고 있었고, 머리는 가지런히 정리돼있었고, 손가락들은 다 펴져있었습니다. 부모님들은 한 아이 한 아이 확인하면서 자신의 아이를 찾았습니다. 한쪽에서 오열소리가 들리면 '한 아이를 찾았구나' 또, 반대편에서 오열소리가 들리면 '아 또 한 아이를 찾았구나' 생각했습니다. 임시안치소 옆에 있다 보니 24시간 통곡소리밖에 들을 수 없었습니다. 제 몸에서 포르말린 냄새가 나 체육관에 가면 저한테서 죽음의 냄새가 난다며 가족들이 저를 피했습니다.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295번째 황지연양을 마지막으로 부모님들의 통곡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지금은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마지막으로 그는 "하루빨리 296번째에서 304번째까지 모두 이름을 찾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도 올해에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라고 소원을 남겼다.
"남은 9명이 다 찾아지기를 기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