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뉘우치지 않을란다' 아베의 외할아버지 그리고 전두환

전두환을 향한 우리 사회의 비판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

등록 2017.04.07 19:41수정 2017.04.07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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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회고록 1권: 혼돈의 시대 1979~1980>. ⓒ 김종성


느닷없이 전두환·이순자 부부가 우리 사회의 스트레스 지수를 가중시키고 있다. 지난 3월 이순자씨(79세)가 <당신은 외롭지 않다>는 회고록을 통해 남편을 변호한 데 이어, 이번 4월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87세)이 <전두환 회고록> 3부작을 통해 자신을 노골적으로 변호하고 나섰다.

이순자 자서전은 700페이지가 넘고, 전두환 자서전은 총 2000페이지에 육박한다. 전두환 자서전의 경우에는, 1979년 12·12 쿠데타 및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전두환에게 유리한 증언이나 진술을 원문 그대로 상세히 인용했다. 상당히 오래전부터 준비한 책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전두환 본인도 그 점을 밝혔다. <전두환 회고록 1권: 혼돈의 시대 1979~1980>의 서문에 따르면, 이미 10여 년 전부터 장남 전재국 씨와 이상희 전 내무장관이 회고록의 초고를 만들고 이를 기초로 민정기 전 공보비서관이 원고를 정리했다.

이렇게 사전에 충분히 준비된 원고를 지금 시점에 출간한 데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작용했을 것이다. 5·18이 임박한 4월에 책을 내면 욕을 먹을 게 뻔한 데도 일부러 3월과 4월 연달아 부부의 책을 낸 데는, 지금의 정치 상황이 불리하지 않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탄핵반대 집회를 매개로 수구세력이 결집을 시도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신들에 대한 동조자들이 나올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거기다가 대선 정국까지 겹쳐 있으니,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비판도 면하고 책도 팔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전두환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홍준표 경남지사처럼 뻔뻔한 주장을 해도 크게 욕을 먹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지자를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회고록 첫 대목에서부터 아주 뻔뻔한 본성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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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 표지에 실린 전두환 사진(오른쪽). 서울 광화문광장 동북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전두환 회고록 1권> 서문의 첫 페이지에서 전두환은 시인 서정주의 <자화상>에 나오는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라는 대목을 인용했다. 그런 뒤에 전두환은 "나의 회고록은 참회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뒷공론을 나는 개의치 않으련다"라며 자신의 죄악에 대한 반성을 전면 거부했다. 참회록 같은 것은 쓸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들과 측근이 초고를 담당했더라도, 전두환 본인 역시 대략적으로 원고를 검토했을 것이다. 원고 작성 및 검토 과정에서 당사자와 측근들이 함께 참여했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는 문구가 글의 첫 페이지에 나온 것을 보면, 전두환과 그 주변 인물들이 얼마나 뻔뻔한지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뻔뻔함은 책 본문에도 계속 드러난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나 '5·18 사태로'로 표현한 전두환은 광주 시민들에 대한 유혈 진압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계속 변명했다. 당시 자신은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이었기에 5·18 진압군의 지휘체계에 속하지 않았으며, 또 광주 현장에도 있지 않았다는 식으로 학살 책임을 부정했다. 책 속에 담긴 뻔뻔함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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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의 영정. 광주광역시 운정동의 국립 5·18민주묘지 내의 유영봉안소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전두환과 닮은 기시 노부스케

반성할 줄 모르는 전두환을 비슷하게 닮은 인물이 있었다. 그 역시 전두환처럼 역사의식도 없고 후안무치했다. 참회를 거부하고 회고만 했다. 전두환과 다른 게 있다면, 그것은 국적이다. 그는 일본인이다. 

그 인물은 1932년 세워진 괴뢰국가 만주국에 파견되어 그곳의 인적·물적 자원을 일본의 침략 전쟁을 위해 동원했다.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이라는 아이디어를 짜내어 훗날 대한민국 박정희가 이를 모방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 인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환인 태평양전쟁이 벌어진 1941년, 일본으로 돌아가 일본 국민과 자원을 전쟁 체제로 묶어내는 데도 기여했다. 상공부 장관으로서 전시 일본 경제를 총괄했다. 직접 전쟁 일선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 인적·물적 자원을 전쟁에 공급함으로써 후방에서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일본 군국주의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전쟁 종결 직후에 A급 전범으로 체포됐다.

문제의 그 인물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1896~1987년) 전 총리다. 아베 신조의 사상과 정치 행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기시 노부스케의 사위이자 아베 신조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1924~1991년) 전 자민당 간사장(사무총장)은 장인인 기시 노부스케한테서 정치를 배웠다. 아베 신타로는 정치적 의미에서 기시 노부스케의 데릴사위였다. 이 때문에 아베 신조가 외할아버지의 정치적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지금 아베 총리가 추진하는 평화헌법 개정운동과 군사대국화는 모두 다 기시 노부스케가 주장했던 것들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외손자인 아베 신조뿐 아니라 지금의 일본 우익 전체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살아서는 일본의 대외침략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하고, 죽어서는 군국주의 부활을 위한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아베 신조 같은 사람을 몇 명 합한 것만큼의 위력을 가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일본 군국주의의 핵심 인물이기 때문에, 기시 노부스케는 1945년 패망 뒤 맥아더 장군의 미군정에 체포되었다. 이때 나이는 50세였다. 혐의는 전범이었다. 그것도 A급 전범이었다. 그는 전쟁 범죄의 지도부 인사로 간주됐다.

그런데 3년 뒤 기시는 불기소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 180도로 바뀐 결과였다. 처음에 중국 국민당을 앞세워 소련(러시아의 전신)을 견제하려 했던 일본은, 국민당이 모택동의 공산당에게 밀리자 중국 대신 일본을 파트너로 선택했다. 꿩 대신 닭이었다. 그런데 일본과 협력하자면, A급 전범 중에서도 미국에 필요한 사람들은 풀어줘야 했다. 기시 노부스케가 석방된 이유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사형을 당했어야 할 기시는 한국전쟁 중인 1953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데 이어, 1955년에는 자유민주당(자민당) 창당을 주도하고 뒤이어 1957년에는 총리 자리에까지 올랐다. 처형장에 끌려갔어야 할 사람이 총리실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기시는 총리 재직시인 1960년에는 자위대의 활동 범위를 넓혀준다는 미국의 약속을 받고 미일안보조약을 미일상호협력안보조약으로 업그레이드시켰다. 이로써 주일미군과 자위대의 영향력이 동시에 배가되었다.

미일상호협력안보조약 체결 당시, 기시는 국민들의 거센 반대를 받았다. 패전을 겪어본 일본 국민들은 기시가 일본을 위험한 데로 끌고 가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기시는 국민적 반발을 무시하고 미일상호협력안보조약 체결을 강행했다. 그런 직후에 총리직을 사임했다. 국민들한테 맞아죽는 한이 있더라도 미일동맹을 기필코 강화시켜놓은 뒤에 총리직을 떠나겠다고 결심했을 만큼, 그는 일본 군국주의에 푹 빠진 확신범이었다.

일본의 영향력을 팽창하기 위한 기시의 노력은 한국을 상대로도 펼쳐졌다. 한국인들이 격렬히 반대한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때도 그는 막후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처럼 그는 일본의 영향력 확장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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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당시의 기시 노부스케.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전두환의 회고록을 무시하면 안 된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기시 노부스케의 태도는 자신과 일본의 범죄행위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났다. 그 역시 전두환처럼 지난날에 대해 반성할 줄 몰랐다. 참회할 줄 몰랐다. 그도 전두환과 비슷한 나이에 회고록을 통해 변명을 늘어놓았다. 금년에 전두환은 87세다. 기시는 88세 때인 1983년 펴낸 <기시 노부스케의 회고록: 보수합동과 안보개정>에서 뻔뻔스러움을 드러냈다. 그도 참회록이란 제목 대신 회고록이란 제목을 선택했다.

필자는 이 회고록을 직접 입수하지 않고, 이 책을 비중 있게 소개한 김준섭 국방대학교 교수의 논문인 <기시 노부스케: 전후 일본의 우익 정치인의 원형>에서 책 내용을 확인했다. 이 논문은 현대일본학회가 2002년 발행한 <일본연구논총> 제15호에 실려 있다.

회고록에서 기시 노부스케는 전쟁을 금지하는 현행 일본 헌법은 일본인의 선택에 의한 게 아니라 미국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언젠가는 일본인들이 이 헌법을 거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현행 헌법이 점령 하의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부터 강요된 것이며, 원문이 영어로 쓰인 번역 헌법이라는 것은 오늘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현행 헌법이 미국에 의해 강요된 것이기 때문에 일본과 일본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행동을 제약하는 장애물이라는 게 기시의 주장이다. 더 나아가 현행 헌법은 일본인이 과거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끼고 스스로를 학대하도록 만드는 자학적인 역사관의 진원지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일본인의 복수심의 싹을 잘라내고, 일본인은 서양 인종에 비해 열등하다고 세뇌시켜, 현재의 패배와 고통은 모두 일본인의 불법적이며 무책임한 침략에 의해 초래된 것이라는 점을 철저하게 인식시키기 위하여, 천황 권위의 부정에서부터 전쟁 범죄인의 체포, 신도 및 신사에 대한 공공자금의 지원 금지, 나아가 가부키 추신쿠라의 상연 금지에 이르기까지 일본 국민생활의 전 분야에 걸쳐 강제·간섭·감시가 가차 없이 실시되었다. 그 집대성이 현재의 일본 헌법이다."

'추신쿠라'라는 가부키(일본 전통극)는 자기들의 주군인 아사노 나가노리를 죽음으로 내몬 정부 관료 기라 요시히사를 죽인 뒤 할복으로 목숨을 끊은 46인 혹은 47인의 무사(사무라이)에 관한 이야기다. 일본의 무사정신을 강조하는 가부키다. 미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복수심을 없애기 위해 미국이 이런 것까지 금지했다는 게 기시 노부스케의 생각이다.

기시는 대외 침략 문제를 놓고 일본이 다른 나라에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도 주장했다. 전범으로 감옥에 갇혀 재판을 기다릴 때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때의 심경을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전쟁에 진 것에 대해 일본 국민과 천황폐하께 대한 책임은 져야 하지만, 미국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 우리로서는 궁지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싸울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후세에 분명히 남겨둘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갖고 그 재판에 임할 생각이었다."

자신들이 벌인 전쟁으로 인해 동아시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목숨을 잃고 얼마나 많이 상처를 입었는지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말이다. 그는 오로지 일본 국민과 '천황폐하'께 승전을 안겨드리지 못한 것만 죄송할 뿐이었다. 전 세계가 일본의 전쟁범죄를 규탄하는 속에서도 이런 회고록을 당당히 남겼다는 것은, 그를 포함한 일본 우익이 얼마나 뻔뻔한가를 잘 보여준다.

이렇게 뻔뻔하고 후안무치한 회고록을 쓸 당시, 기시 노부스케는 이미 현직에서 물러난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회고록이 갖는 힘은 대단했다. 그의 회고록은 일본 우익을 결집시키는 데 기여했고, 그의 외손자가 훗날 총리에 올라 외할아버지의 유지를 실천하는 데도 기여했다.

마찬가지로, 전두환이 현직에서 오래전에 물러났다 하여 그의 회고록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뻔뻔하고 후안무치한 글들이 자꾸자꾸 쌓이다 보면, 일본에서처럼 한국에서도 수구세력이 지난날의 영광을 회복할 목적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이 자꾸만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그런 혼란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라도 전두환에 대한 우리 사회의 비판은 멈추지 말고 계속되어야 한다.
#전두환 회고록 #기시 노부스케 #전두환 #이순자 #5.18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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