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시인, 이 조합이 낯설지 않은 이유

[이란 역사문화기행 16] 사디 영묘

등록 2017.04.10 12:02수정 2017.04.11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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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디 영묘 찾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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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디 영묘 ⓒ 이상기


사디는 허페즈와 함께 쉬라즈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이들 시인의 묘는 쉬라즈 시내를 동서로 흐르는 코쉬크(Khoshk)강 북쪽에 있다. 살만 파르스(Salman Fars) 대로를 따라 강을 건넌 다음, 부스탄(Bustan) 대로를 따라 가면 도로 끝에 사디 영묘가 있다. 강을 건너면서 보니 가물어서 그런지 수량이 아주 적다. 강북으로는 산이 민둥산이다. 이란은 전체적으로 황토고원에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 비해 사디 영묘는 오렌지나무, 야자나무, 사이프러스 나무가 무성한 정원에 감싸여 있다. 영묘로 들어가는 길 안쪽에는 수로와 화원을 만들어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노란색과 보라색 봄꽃들이 지천이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이곳을 어린 아이들이 많이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통복장을 한 녀석들도 많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이 참 밝고 마음도 맑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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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디 영묘를 찾은 아이들 ⓒ 이상기


아이들과 시인, 우리에게는 낯선 조합이지만, 이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사디의 시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어린 아이들이 많이 찾고 있다고 한다. 나중에 우리는 허페즈 영묘에서도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이들의 삶이 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집에 페르시아 시선집이 꼭 비치되어 있다고 할 정도니.

시라는 것이 읽고 이해하기 쉽지는 않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부터 친해지면 평생을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 시다. 던져주는 메시지가 그 어떤 장르보다 감동적이고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나 선생이 아이들에게 문학과 시의 가치와 의미를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그는 평생 시 또는 시인과 친해질 수 있는 것이다. 삶속에서 시가 점점 멀어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 이 학생들이 반갑고 또 고맙다. 

사디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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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라즈 시내를 관통하는 코쉬크강 ⓒ 이상기


페르시아 문학은 서정적인 듯 하면서도 심오한 사상을 담고 있다. 그것은 시인들이 페르시아 고전문학의 전통과 이슬람 사상에 정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시인들은 언어의 마술사다. 그것은 그들이 이웃하고 있는 나라의 언어에도 능통하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학자와 시인은 자신의 언어는 물론이고, 그리스어, 아랍어, 아나톨리아어, 인도어 등을 구사하면서 이들 언어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개방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디(1213-1292)도 학자이자 시인으로 유럽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쉬라즈에서 태어나 바그다드의 니자미야(Nizamiyya)대학에서 역사, 법학, 아랍문학, 이슬람 사상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십자군과 몽골족의 침입이라는 큰 시련을 맞아 25년 정도 아나톨리아에서 인도에 이르는 중동 전 지역을 유랑하며 살았다. 그는 또한 이집트, 예루살렘, 알레포 등 소아시아와 지중해 연안 도시에서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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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파 ⓒ 이상기


특히 알레포에서는 수피교단에 가입했고, 십자군원정에 참여한 기독교도와의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하이파 근방에서 십자군의 포로가 되어 7년 동안을 거의 노예상태로 지내기도 했다. 한쪽에서는 십자군의 침입을, 다른 쪽에서는 몽골족의 침입을 겪으면서, 그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 만나고 온갖 체험을 할 수 있었다. 포로에서 물려나면서 그는 메카와 아라비아 반도를 여행했다고 한다.


사디는 일한국(Il-khanate: 1256-1353)시대 실크로드 대상을 따라 인더스강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그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현재 파키스탄 카라치를 지나 인도의 델리까지 여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구자라트(Gujarat)주 관리의 초청으로 솜나트(Somnath)에 머물기도 했다. 그는 그곳에서 힌두교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브라만과 교유를 하게 되었다.

사디가 시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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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 가득한 사디 영묘 ⓒ 이상기


사디가 고향인 쉬라즈로 돌아온 것은 1257년이다. 그해 그는 <부스탄(Bustan: 향기 정원)>이라는 시집을 낸다. 이것은 30년 가까운 여행편력의 결과물이다. 10장으로 구성된 이 시집에서 사디는 정의, 자비, 사랑, 체념, 후회, 감사 등 인간의 심리를 다루고 있다. 형식은 마스나비(Masnavi) 스타일이라고 한다. 마스나비 양식은 한 행이 11개의 음절로 이루어져 있다. 행의 끝은 aa bb cc형식을 취하고, 길이에는 제한이 없다.

사디는 시집의 서문에서 글을 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고향 쉬라즈로 돌아와 이 시집을 낸다. 나는 사탕보다 더 달콤한 진실한 이야기를 전하겠다. 이 책을 통해 여러분은 열 가지 가르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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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제국에서 발간된 <부스탄> 책 표지 ⓒ 이상기


나는 온 세상을 여행하면서 수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다.
세상 곳곳에서 가르침을 얻었다. 곡식 단으로부터 이삭을 따듯이.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쉬라즈보다 더 고상한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
신이 보듬고 있는 땅. 그래서 나는 이 도시의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에 대해 품었던 애정은 이미 다 사라져 버렸다.

드넓은 세상을 체험하고 빈손으로 친구 곁에 돌아오는 게 안타깝다.
이집트를 여행하고 오는 사람은 친구 선물로 사탕 캔디를 가져온다. 
비록 내가 사탕을 가져오진 못했지만, 내겐 더 달콤한 이야기가 있다.
내가 자져온 사탕은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걸 가져갈 것이다.   
내가 이제 궁전을 지어 열 가지 가르침을 주는 문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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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디 영묘를 찾은 아이들 ⓒ 이상기


그리고 1년 후인 1258년 <골레스탄(Golestan: 장미 정원)>이라는 산문집을 낸다. 이야기 형식으로 개인적인 일화를 담고, 중간 중간 금언, 충고, 반성의 형태로 시를 넣었다. 이 책은 8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왕의 매너, 수도승의 도덕, 만족의 위대성, 침묵의 장점, 사랑과 청춘, 늙음과 쇠약, 교육의 효과, 행동규범(처세술).

사디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먼저 그는 산문체로 친구와 대화를 주고받으며,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가르침을 주기 위해 글을 쓴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시로 그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사디는 장미꽃을 통해 영원성을 이야기하고, 우정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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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5년 무굴제국에서 발간된 <골레스탄(장미 정원)>의 사디와 친구 ⓒ 이상기


나는 친구와 함께 정원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어. 다음 날 아침 그가 떠나려고 하면서, 온갖 꽃과 허브 등을 꺾어 옷섶에 넣고는 집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보았지. 그래서 내가 말했어. "너도 알다시피, 정원의 장미는 시들 수 있어 그리고 계절도 지나가." 그런데 철학자들은 다르게 말하지. "지속성이 없는 것은 소중하지 않다"고. 그가 물었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나는 대답했지. "나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가르침을 주기 위해 글을 쓰려고 해, 장미 정원이라는 책을. 그곳의 잎들은 가을날의 돌풍에도 끄떡없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봄날의 기쁨이 가을까지 결코 변치 않을 거야."

한 줌의 장미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
장미 정원에서 한 송이만 가지고 가.
한 송이 꽃은 단지 오륙일 피어있지만
장미 정원은 늘 기쁨을 주거든.

영묘 자체보다는 시인 때문에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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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디 영묘 ⓒ 이상기


사디 영묘는 정원과 수로의 끝에 있다. 영묘로 가면서 계단을 몇 번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영묘 앞에는 연못이 만들어져 있다. 건물 안으로 물을 끌어들여 정원을 만드는 것, 이것이 이슬람 건축의 기본이다. 연못과 꽃밭 주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과 대화도 하고 사진도 찍은 우리들은 이제 영묘 건물로 올라선다.

사디 영묘는 4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개방된 전실과 사방 벽으로 둘러싸인 묘실로 이루어져 있다. 전실 쪽 가운데 문을 통해 묘실로 들어가면 사디의 석관을 만날 수 있다. 석관에는 아랍어로 된 조각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벽에도 꾸란의 구절로 보이는 글귀가 잔뜩 쓰여 있다. 벽은 대리석이지만, 하단부에는 채색 타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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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디 대리석관 ⓒ 이상기


창은 유리로 만들고 꽃무늬를 집어넣었다. 이 건물은 지어진지가 그리 오래 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건물의 양식이나 내부 장식이 현대적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단순한듯하면서도 화려하다. 그러므로 영묘가 가지는 의미보다는 사디의 문학이 가지는 의미가 훨씬 더 크다. 영묘 안에는 1893년부터 1926년까지 사디 영묘를 돌본 시인 슈리데(Shourideh)의 무덤도 같이 있다.

영묘를 나오면서 우리는 주변에 잘 가꾸어진 나무와 꽃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본다. 이들 사이로 서점과 기념품점이 있다. 이곳에서 <페르시아 시인 선집>과 <허페즈 시집>을 팔고 있어, <허페즈 시집>을 한 권 샀다. 이 시집은 영어와 이란어가 병기되어 있고, 중간 중간 삽화가 있다. 이걸 읽어내야 하는 큰 과제를 또 하나 떠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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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킬 바자르 정원 ⓒ 이상기


다음 행선지는 카림 한 궁전이다. 그곳에 가기 전 우리는 바킬 바자르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이번에는 양고기 케밥을 먹었다. 이곳에서도 민속공연을 함께 즐길 수 있었다. 식사 후에는 시간이 좀 남아 바킬 바자르에서 기념품도 산다. 지갑을 두 개 샀는데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다. 바킬 바자르에는 200개 가량의 가게가 있으며, 카페트, 의류, 수공예품, 향신료, 생활용품 등이 판매된다.
#사디 영묘 #쉬라즈 #<부스탄> #<골레스탄> #페르시아 대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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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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