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토끼>, 2011, 문학동네
문학동네
모든 전쟁이 끝난 세대, 그리고 풍요로운 비전만이 제시된 세대가 바로 60년대를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위치였다. 그것은 '래빗' 해리의 연령대이면서 작가 존 업다이크 스스로가 속한 세대이기도 했다.
헌데 겉으로 보기엔 아무 걱정도 없을 것 같은, 무난하고 행복한 중산층으로 살아가기가 어렵지 않아 보이는 시대에 정작 그런 기회를 누릴 당사자인 청년들은 근거없는 불안과 공허감에 휩싸여 있었다. 무언가 지금과는 다른 희망, 혹은 구원이 존재할 것이라는 근거없는 충동에 의한 일탈감은 젊은 세대를 아우르는 감정이었다.
그런 현실에서의 집단 불안, 충동 현상을 업다이크는 수려하게 문학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한다. <달려라, 토끼>는 미국 작가의 소설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매 문장마다 표현력이 탁월하다. 작중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상태를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은유적으로 밀고 당기며 묘사해 독자들의 집중력을 한껏 끌어올린다.
게다가 주변 풍경에 대한 묘사도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는 점 없이 감각적으로 표현해 낸다. 이 점이 매 페이지를 쉽게 넘기기 보다는 오래 한 장면을 읽으며 그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그려내게 만든다. 순수 문학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린, 감탄할 만한 필체였다.
다만 그렇게 탁월한 문학적 재능으로 그려낸 해리의 일탈기는 너무나 '슬픈 모험'으로 비추어진다. 결국 책을 덮을 때 독자가 보게 되는 것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는 사실 뿐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잃은 것은 많았다. 그 짧은 일탈의 끝에서 해리는 부모의 신뢰와 가정의 안정을, 경제적 기회를, 심지어 자신의 자식을 모두 떠나 보내고 말았다.
"래빗은 진실을 느낀다. 그의 삶을 떠난 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아무리 찾아 헤매도 되찾아올 수 없다는 것. 아무리 날아가도 거기에는 이를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여기 있었다. 도시 밑에, 이 냄새와 이 목소리들 안에, 영원히 그의 뒤에."애시당초 해리는 차를 몰고 멀리 횡단을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금세 그것을 포기해 버린다. 늘 그런 모습이었다. 새로운 여자와의 관계도, 아내와의 재결합도, 그리고 최후의 도주도 모두 충동적으로 결정되나 또한 그렇게 철회된다. 사실 그것이 소시민적 일탈의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확신없는 기대, 혹은 빛바랜 지난 세월의 영광이 언제나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금세 터져나가고, 그에 따라 자신의 근자감과 충동도 커졌다 삐쩍 사그라드는 모습.
해릿은 그의 눈, 그의 생김새 때문에 토끼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어느덧 성인이 된 그의 행동 역시 토끼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열심히 달리지만 언제나 주위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웅크리게 되는 모습, 그 '달리기'가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뜀박질이라는 사실까지. 그것이 바로 해리였고, 업다이크 자신이었으며, 당대 미국 소시민의 모습이었으리라.
두 세대 가까이 지난 오늘날, 지구 정반대편 한국의 청년이 읽어도 그 소시민적 발버둥의 애처로움과 불편함이 생생하게 전달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과연 훌륭한 명작의 반열에 들만한 소설이었다. 또한 그 이야기에 어느덧 공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또 하나의 '래빗'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슬퍼지는 이야기였다. 이 소설이 세계의 많은 토끼들을 위로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구나 그렇기에 슬퍼하지 말라고, 토닥여주기를 바란다.
달려라, 토끼 (반양장)
존 업다이크 지음,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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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시민기자. 서울대 로스쿨 졸업. 다양한 이야기들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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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소시민의 슬픈 모험 <달려라,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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