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이 이끄는 전라도, 충청도 연합군이 광교산(위 사진) 일원 전투에서 참패하여 흩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평양을 떠나 북쪽으로 피란을 결행했다.
정만진
경상우도 의병 부대와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수군 덕분에 일본군의 침탈을 받지 않았던 전라도 군사들이 충청도의 지원까지 받아 약 3만의 대군을 형성, 한양을 향해 북진했다. 그러나 이들은 광교산 일대에서 1600명에 불과한 일본군에게 어이없이 궤멸되었다. 신립이 남한강에 투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을 버렸던 선조는 이광이 이끄는 전라 · 충청 연합군이 풍비박산 나자 다시 평양을 버리고 압록강 아래로 달아났다.
수군은 달랐다. 조선 수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이순신은 5월 4일 전라 좌수영의 판옥선 24척, 작은 협선 15척, 포작선(군량 수송을 위해 동원한 고기잡이배) 46척을 이끌고 여수를 출발했다. 자신의 방어 구역은 아니지만 일본군이 쳐들어 와 쑥대밭을 만들고 있는 경상도 바다를 되찾고 왜선들을 격침하기 위해서였다.
육군은 연전연패, 수군은 연전연승<난중일기>에 따르면 조선 수군은 5월 7일 일본 수군과 처음으로 마주쳤다. 거제도 '옥포대첩 기념관'이 답사자에게 배부하는 소형 홍보물 <옥포 대첩 기념 공원> 중 '옥포대첩의 의의' 일부를 읽어본다.
'5월 7일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 경, 이윽고 이들 91척의 함대가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 장군이 타고 있던 판옥선에 전방의 척후선(정찰선)으로부터 옥포 선창에 적선이 있음을 알리는 신기전(신호를 알리는 화살)이 날아들었다. 이순신 장군은 여러 장병들에게 적선의 발견을 알림과 동시에 전열을 가다듬고 준엄한 목소리로 "가볍게 움직이지 말라. 태산같이 침착하게 행동하라!"는 주의와 함께 공격 개시 군령을 내렸다. 맹렬한 공격으로 옥포 선창에 정박해 있던 적선 50여 척 중 26척이 격파되니 한창 강성하던 적의 기세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중략) 5월 7일 옥포 대첩은 임진왜란이 시작된 후 조선군이 얻은 최초의 승리였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아군의 첫 승리인 옥포 해전 참전 장수를 중심으로 당시 조선 수군의 주요 지휘부 인물들을 관직의 높낮이 순서대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동급인 때는 나이 순서로 소개함.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바로 달아나버린 경상 좌수사 박홍과 1597년 정유재란 때부터 남해안 해전에 참전하게 되는 충청 수사 최호는 표에 없음. 경상, 전라, 충청 전체를 관장하는 삼도 수군 통제사는 해전에 효율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1593년 8월부터 신설됨.)
정3품 원 균(1540∼1597) 경남 거제도, 경상 우수사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전남 여수, 전라 좌수사 이억기(1561∼1597) 전남 해남, 전라 우수사 종3품 권 준(1541∼1611) 전남 순천, 순천 부사 김 완(1546∼1607) 전남 여수 화정, 사도 첨사 이순신(李純信, 1554∼1611) 전남 여수 돌산, 방답 첨사 종4품 정 운(1543∼1592) 전남 고흥 녹동, 녹도 만호 한백록(1555∼1592) 거제도 동남부, 지세포 만호 우치적(1560∼1628) 거제도 동북부, 영등포 만호 이운룡(1562∼1610) 거제도 동중부, 옥포 만호 종5품 기효근(1542∼1597) 경남 남해도, 남해 현령 종6품 어영담(1532∼1596) 전남 광양, 광양 현감 배흥립(1546∼1608) 전남 고흥, 흥양 현감 임란 당시 조선 수군의 중추 지휘관이었던 한백록12명 중 원균, 이순신(李舜臣), 권준, 김완, 정운, 기효근, 어영담, 배흥립 등 8명은 한백록에 비해 23세(기효근)∼5세(권준) 나이가 많았고, 이순신(李純信)은 한백록보다 한 살 많은 38세로 동년배였으며, 이억기, 우치적, 이운룡 3명은 나이가 어렸다. 벼슬의 높이로 보면 6명이 한백록보다 높았고, 3명은 같았으며, 3명은 낮았다. 이는 한백록이 조선 수군의 중추 지휘관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백록(韓百祿, 1555∼1592)은 26세인 1580년(선조 13) 무과에 급제했다. 종6품 진잠(대전 유성구) 현감 등을 역임하던 그는 통신사가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뒤인 1592년 1월 이후 종4품 지세포(거제시 일운면) 만호에 임명되었다.
이경일은 한백록 묘갈명(묘비에 새긴 글)에 '신사(조선 통신사) 황윤길, 김성일이 일본으로부터 적의 정세를 탐지하고 돌아왔다. (전쟁 발발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에) 조정에 동요가 일어났다. 공(한백록)이 용맹하므로 선발되어 지세포 만호에 제수되었다. 공이 급히 임소(임무를 맡은 자리, 즉 지세포)로 달려가 불우(갑작스러운 일, 즉 임진왜란)에 대비하였다.'라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