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12월, 노벨평화상 시상식은 수상자인 류사오보가 불참한 상태로 진행됐다.
EPA-연합뉴스
중국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이 분분하다.
중국 정부가 ▲ 간암 말기 판정을 받은 그를 사망 직전에야 감옥에서 풀어주고 ▲ 해외에서의 신병 치료를 불허하고 ▲ 사망 이틀 만에 유해를 화장한 뒤 바다에 뿌리고 ▲ 소셜미디어에서 그를 추모하는 '해장(海葬)' 등의 단어 사용을 막았다는 언론 보도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빈 의자' 갖다놓은 노벨상 시상식, 중국에서 방송불가1955년생인 류샤오보는 사춘기에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대학입학시험을 치른 첫 세대(77학번)였다. 1988년 베이징사범대 중문과 강사였던 류샤오보는 그때까지 미국과 노르웨이 등에서 중국 현대문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평범한 학자'였다. 이듬해 5월 중국 천안문광장의 대규모 학생 시위 소식을 접하고 미국 콜럼비아대 방문교수 일정을 접고 급거 귀국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그가 대학강사·음악인·전직 언론인 등 3명과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 시위를 요구하는 단식 농성에 돌입한 다음날(1989년 6월 3일)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군대를 동원해 이들을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소요 선동' 혐의로 체포된 그는 모두 세 차례 감옥신세를 졌다.
특히 1977년 체코 반체제 인사들의 '77 헌장'을 본 따 2008년 12월 10일 중국의 일당 독재 종식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명사들의 선언을 주도한, 이른바 '08 헌장(零八憲章)' 사건은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그에게 2~3년 정도의 '가벼운 형'을 내렸던 중국 법원도 이번에는 그에게 국가권력 전복 선동 혐의로 11년의 중형을 내렸다.
형 확정 8개월 만인 2010년 10월 8일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가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한 것은 국제사회의 논쟁을 더욱 확산시켰다. 중국인(중국 국적 보유자) 최초의 노벨상을 정치범에게 준 것도 이례적인 결정이었지만, 본인의 시상식 참석은 물론이고 지인·친지의 '대리 수상'을 막고 각국 외교사절의 시상식 참석을 만류한 중국 정부의 대응도 '초강경' 일색이었다.
1935년 나치 독일의 칼 폰 오시에츠키, 1975년 구소련의 안드레이 사하로프, 1983년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 1991년 미얀마의 아웅산 수 치의 경우 당사자들이 신병 등의 문제로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가족·지인들의 대리 수상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류샤오보 대신 '빈 의자'를 갖다놓고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의 BBC·CNN 생중계는 중국 내에서 방송되지 못했다.
'노벨상 수상자 석방'을 둘러싼 중국과 미국·EU의 신경전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간암을 앓던 그를 죽음 직전에야 풀어준 중국 정부의 처사는 사회주의 운동가 안토니오 그람시를 1936년 4월 27일 사망 직전에야 가석방한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부에 비견된다.
"중국이 홍콩과 같이 되기 위해선 300년 식민지화 필요"그러나 그의 죽음을 계기로 중국의 민주화와 인권문제를 되돌아보려는 국제사회의 움직임과는 달리 중국 내부의 움직임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다. 사실 이같은 반응은 그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직후부터 예고됐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2010년 12월15일)이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을 재인용한 기사에 따르면, 중국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공식 여론조사에서 류사오보와 '08 헌장'에 대해 '모른다'고 응답한 사람이 85%에 이르렀다. 국민 전체로 확대할 경우 인지도가 더욱 떨어질 것을 보여주는 결과다.
중국 정부의 엄격한 언론통제가 이 같은 결과를 만들어낸 주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지만, 그가 생전에 보여준 극단적인 언행이나 주장이 스스로의 입지를 축소시킨 측면도 없지 않다.
"중국에 300년의 식민지화가 필요하다"는 발언이 대표적이다. 그는 1988년 11월 27일 홍콩의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어떤 조건에서 중국이 역사의 변화를 이룰 수 있겠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홍콩은 지금의 모습을 갖추는 데 100년이 넘었다. 중국의 크기를 감안할 때 오늘날의 홍콩과 같이 되기 위해서는 300년의 식민지화가 필요하다. 나는 300년이면 충분할지도 의심스럽다."이 인터뷰는 1978년 12월 중국의 최고권력자 덩샤오핑이 경제 개방 노선을 천명한 지 10주년이 되는 시점에 이뤄졌다. 외국으로부터 적극적인 투자를 받아 매년 10% 안팎의 비약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지만 '당의 국가 지배'를 포기하지 않는 중국공산당 정부를 향해 답답함을 강하게 표현한 발언이었다.
중국공산당이 정치개혁을 실시하지 않기 때문에 경제가 기형적으로 발전하고 양극화와 부패가 심화되고 법치의 실현이 갈수록 요원해진다고 그는 판단했다. 이듬해 천안문광장에서 발표한 단식선언문에서는 "누가 사퇴하고 집권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떠한 방식으로 사퇴하고 집권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류샤오보는 중국의 혁신을 위해서는 정치시스템 등 서구의 문화를 직수입하는 것도 불사해야 한다는 취지로 '300년 식민지화'를 언급했는데, 이 같은 발언은 19세기 이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괴롭힘을 받아온 중국인들의 피해 의식을 간과한 것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가개조'를 역설하면서 방법론적으로는 "식민지근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편 격이다. 류샤오보는 2006년 12월 19일 같은 잡지에 보낸 기고문에서 18년 전 자신의 발언이 즉홍적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발언 자체를 철회하지는 않았다.
'300년 식민지화 발언'이 그의 입지를 곤란하게 할 것을 알면서도 대중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리는 노력에는 상대적으로 무심한 편이었다.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에 반발해 '공자평화상'이라는 대안상을 추진한 베이징 시인 차오다모는 그를 싫어하는 이유로 '300년 식민지' 발언을 꼽았다.
냉전 붕괴 후 이라크전 등에서 미국 옹호, 미국의 재정 지원 받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