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람과 관계가 교차하는 곳, 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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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비추는 문학의 용어를 다시 현실로 가져와보자. 개인은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수많은 개개의 크로노토프들은 서로 갈등하고 포용하면서 공존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개개의 크로노토프를 통해 사회 전체를 꿰뚫는 하나의 크로노토프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지면에서 주목하는 거대한 크로노토프는 '플랫폼'이며, 개개의 서사들은 바로 '플랫폼 노동자'다. (국어사전에서 플랫폼은 '역에서 기차를 타고 내리는 곳'으로 정의함. 즉 승강장, 정거장을 뜻함. 기술의 발달을 통해 플랫폼이란 뜻도 다양해짐. 원래 플랫폼은 'plat(경계를 정한 공간)'과 'form(형태)'의 합성어이다. 즉 '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함. 최근 가장 일반적으로 쓰는 플랫폼의 의미는 '인터넷 정거장'임. '스마트 시대'에서 인터넷 사업자·콘텐츠 제공자·고객 등 다양한 주체들이 만나는 약속 장소가 바로 플랫폼. (참고: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123159))
오늘날 플랫폼은 주로 스마트폰 앱으로 매개된다. 앱을 통해 남는 방, 자동차, 장비를 빌려줬다. 이것은 일종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노동력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시간성이 더해졌다. 플랫폼 안으로 서사의 주체인 개인이 대거 들어왔다. 에어비앤비, 우버, 메카니컬터크까지 가지 않더라도 카카오 드라이버, 배달의민족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현실화된 미래의 노동중개 형태인 플랫폼은 다음과 같은 희망을 제시한다. 미래를 스스로 일구고 싶은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창업의 무한한 대지가 디지털 공간에 펼쳐진다. 이런 형태의 독립고용노동은 최고의 임금을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게 한다.
플랫폼 노동이 이전의 한시적 고용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면 '속도'다. 이전에는 십분 만에 고용하고, 십분 만에 해고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디지털 플랫폼은 이를 가능케 한다. 이럴 때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게 필연적으로 생긴다. 느린 사회적 합의과정을 요하는 법제도가 그렇고 느린 진화과정을 수반하는 노동자의 신체가 그렇다.
법제도를 먼저 생각해보자. 이미 한국에서도 배달업을 중심으로 플랫폼 노동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와 같은) 비판자들은 말한다. 고용의 파편화는 사회계약의 폐지다. 사회보장제도의 기원은 노동력 재생산이며 이를 위해 노동자의 신체 보호가 제도화 되었다. 따라서 사회권이 보장되고 노동은 건강, 안전, 존엄이 보장되는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총론은 그럴듯하게 쓸 수 있다. 하지만 효과적일까? 렌느1대학 조세파 디링제는 이런 식의 접근은 도급인에게 합당한 책임을 묻겠다는 사회법의 입법 목적을 약화시키며, 보편성으로 특수성을 희석시킴으로써 오히려 개별 법 적용의 필요성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한다. 프랑스보다 삭막한 우리 현실에서는 플랫폼 노동이 단순히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고)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디지털 특고'다. 그러나 단순히 '디지털 특고'라는 틀로 본다면 플랫폼 노동 안에 있는 여러 고용관계의 차이가 은폐된다. (이 논의는 이 지면에서는 논외로 한다.)
영국의 우버(uber) 노동자들의 경우를 보자. 영국 일반노조는 우버를 상대로 소를 제기했고 이에 승소해 우버 노동자들이 노동자성을 인정받았다. 최저임금 보장, 유급연가 사용권과 노동시간 제한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이는 우버라는 플랫폼의 특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버 노동자 들은 실질적으로 인격권이 종속됐으며, 이는 우버에 사용자성을 부과하는 주요한 논거가 되었다. 반면, 프랑스는 우버가 사용자인가 대한 판단을 보류 했다. 노동자의 노동은 고객을 향한다. 노동제공의 조건은 플랫폼이 정한다. 노동자의 급여는 고객이 지불한다. 플랫폼과 고객 모두 별점을 통해 노동자를 감독한다. 누가 사용자인가? 과연 한국의 법체계는 이런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