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가면 내가 폭력적인 사람이 될 것 같아 두려웠어요. 제가 맞는 것도 무섭지만 제가 누군가를 때리는 사람이 될까봐. 제가 안 때리려고 해도 윗사람이 왜 안 때리느냐고 할 수 있으니까요."
이희훈
법정구속된 용석씨는 바로 인천구치소로 보내졌다.
모욕. 그날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다. 구치소로 들어갈 때 모두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 몸에 돈이든 물건이든 숨기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항문검사도 한다. 요즘은 카메라로 하는데 그 때는 교도관이 직접 했다.
거부했다. 구치소 쪽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용석씨는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속옷을 내렸다. 교도관이 용석씨의 그곳을 확인했다.
모욕, 수치, 불쾌함.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용석씨는 아직도 그 교도관의 얼굴을 생생히 기억한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얼굴이다. 감옥 생활 중 가장 안 좋은 기억이기도 하다.
모욕적이었던 구치소 입소, 노역하느라 정신없던 교도소 생활. 감옥보다 군대가 낫지 않았을까. 용석씨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군대에 가면 내가 폭력적인 사람이 될 것 같아 두려웠어요. 제가 맞는 것도 무섭지만 제가 누군가를 때리는 사람이 될까봐. 제가 안 때리려고 해도 윗사람이 왜 안 때리느냐고 할 수 있으니까요."누군가를 때린 적이 없는 그였다. 학창시절 말싸움은 했어도 주먹다짐은 안 했다. 부모님께도 맞은 기억이 거의 없다. 폭력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그에게 군대는 '폭력'과 동의어였다.
상관과 싸우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다면 용석씨는 군대에 갔을 것이다. 하지만 군대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상사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한다. 문제제기가 통하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군대를 갔다 온다고 해서 모두 폭력적으로 변하진 않는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물리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에 익숙해진다.
"폭력에 길들여질까봐 무서웠어요. 그런 저를 상상 할 수 없었죠."폭력에 지는 것보다 자유를 잠시 제한하는 걸 택했다.
"삼성이 있는 나라 맞냐?"2007년 10월 26일 가석방됐다. 다시 전쟁없는세상 활동에 나섰다. 이후 잠시 회사를 다닌 적도 있지만 그때도 전쟁없는세상에 한 발은 걸친 채였다. 지난 2015년 전쟁없는세상에 복귀해,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전쟁없는세상의 상근 활동가는 3명이다.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용석씨만 주 5일 상근자로 일한다. 나머지는 이틀 또는 사흘만 일한다. 용석씨는 최저임금만 받으며 병역거부 캠페인을 담당하고 있다. 대체복무 도입 캠페인 기획부터 사무실 잡무까지 모두 용석씨 몫이다. 2~3주에 한 번은 병역거부자들에게 교도소 밖 소식을 전하는 전령사 역할을 한다. 예비 병역거부자 상담도 하고 있다.
요즘에는 상담이 부쩍 많아졌다.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예비 병역거부자들이 전쟁없는세상의 문을 두드린다. 한 달에 2~3명 정도가 상담을 받고, 1년에 4~5명이 비종교적인 이유로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2013년 양심적 병역거부로 프랑스에서 난민인정을 받은 이예다씨 사례가 알려지면서, 문의가 늘어났다.
"난민인정을 받으려고 '난 코리아에서 왔다. 코리아에선 병역거부로 한 해에 400~700명이 감옥에 간다'고 하면 외국 국가들은 '노스코리아에서 왔냐'고 물어본대요. '사우스에서 왔다'고 하면 '삼성이 있는 그 나라 맞느냐고. 민주주의 국가인데 양심의 자유가 인정되지 않느냐'며 되물어본다고 하더라고요."용석씨는 난민 신청을 권하지 않는다. 난민 인정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시간도 꽤 된다. 그렇게 인정을 받으면 다행이다. 실패하면 인생이 꼬인다. 해외에서 불법체류자로 떠돌면서 살거나 한국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들을 기다리는 건 감옥 아니면 군대다.
대체복무를 외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