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담임선생님의 호출을 받았다. '무슨 일이지' 궁금해하며 교무실로 갔다. 담임선생님이 서류를 보며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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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담임선생님의 호출을 받았다. '무슨 일이지' 궁금해하며 교무실로 갔다. 담임선생님이 서류를 보며 말씀하셨다.
"너 장래희망에 무기제조업자라고 썼더라.""네. 핵무기를 없애는 무기를 만들려고요.""그래도 장래희망에 무기제조업자라고 쓰는 건 아닌 거 같은데... 나중에 네 시어머니 되실 분이 생활기록부라도 떼 볼 수도 있는데, 무기제조업자라고 쓰여 있으면 시집갈 수 있겠니?"
선생님은 장래희망을 '무기제조업자' 대신에 '사업가'로 바꾸겠다고 하셨다. 그 말이 그 말이라나? 그렇게 말하곤 수업에 들어가 버리셨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 과목을 제일 좋아했다. 장래희망은 과학자였고. 그러던 어느 날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핵무기의 존재를 알게 된다. 평화를 위해서 과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고민했다. 그러다 핵무기를 무력화시키는, 쉽게 말하면 고장 내는 무기를 만드는 무기제조업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던 게다.
그런데 고1 담임선생님 때문에 내 장래희망이 지워지고 대체됐다. 미래에 '생기게 될지도 모르는' 시어머니가 혹시 생활기록부를 찾아볼지도 모른다고 했다. 선생님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거다. 생활기록부에 적힌 장래희망 따위에 제자가 좋은 혼처를 놓치게 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겠지.
그런데, 만약 내가 남학생이었더라도 같은 일을 당했을까. 선생님이 나를 불러 예비 장모나 장인 말씀하시며 무기제조업자인 장래희망을 바꾸라고 했을까. 아마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 지난 일이다. 물론 나는 무기제조업자가 되지도 않았고, 한때나마 무기제조와 관련 있는 학과로 알고 입학을 희망했던 무기재료학과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내 장래희망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삭제되고 바뀐 것에 대한 불쾌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내 장래희망을 바꿀 권리가 있는 사람은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게다가 미래의 시어머님 때문에 바꾸라니.
"형수님~" 난 '사람'이기 전에 '여자'였다 수학을 좋아했던 나는 2학년이 되어선 고민 없이 이과를 선택했다. 대학은 공대에 갔다. 여학생이 적지만, 큰 어려움을 겪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따뜻한 봄날 미팅에 다녀온 남자 동기들이 돈이 없다며 밥을 사달라고 했다. 그날은 내가 미쳤지. 녀석들에게 왜 귀한 식권을 줬을까? 지금도 후회되는 일이다. 밥 먹는 녀석들에게 물었다.
"여자들은 어땠어?""예쁘냐고? 야~ 너만 못하더라."다들 웃었는데,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자리를 떠난 뒤에도 그 말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다. 분명 내가 미팅에 나온 여자애들보다는 예쁘다는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나에 대한 칭찬은 아니었다. 그냥 나는 녀석들이 여자의 미모를 평가하는 기준일 뿐이었다. 나도 너도 다 아는 우리 과 남자아이들의 기준점, 출발점.
그날 이후 나는 내 식권을 함부로 과 동기 남학생에게 주지 않았고 '그 여자 어때?'라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다시는 기분 나쁜 기준점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얼마 뒤 우리는 엠티를 가게 되었다. 과 대표는 엠티 가자며 여학생만 열심히 쫓아다녔다. 남학생은 신경도 안 썼다. 왜냐하면 엠티 참석 여부를 묻는 과 대표의 질문에 남학생들이 "여자 몇 명 가?"란 말로 되물었기 때문이다.
과 대표는 엠티의 성공을 위해 여학생을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려고 애썼다. 덕분에 여학생들 거의 다 엠티에 참석했다. 기타를 치고 노래 부르며 방에서 놀고 있는데 소위 우리 과의 '대표 훈남'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소리를 질렀다.
"옆 방 여대랑 내일 과팅한다."훈남 옆에는 서 있던 녀석은 얼굴이 벌겋게 흥분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과팅이 성사되는 역사적 현장을 봤다나 뭐라나? 방에서 자빠져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환호성을 지르며 포옹했다. 그걸 지켜보던 여학생들 황당했다.
"우린 뭐 하라고? 엠티는 멤버십 트레이닝이야! 이럴 거면 엠티 너희끼리 오지. 우린 왜 데려왔는데?"우리의 목소리는 녀석들의 환호성에 묻히고 말았다. 이런 일 나만 겪은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과거 배우 이광수가 출연한 '공대 아름이' 광고를 보면.
나는 3학년 1학기까지 학교를 다니고, 1년간 휴학했다. 3학년 2학기로 복학했는데 같은 학년에 100명이 넘는 학생 중 여자라곤 나 포함해서 딸랑 셋이었다. 나와 후배 여학생 둘.
나는 공부를 안 한 탓에 학점이 좋지 않았다. 복학 후엔 학점 관리에 신경 썼다. 안 그랬다간 8학기로 졸업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수업도 열심히 참여하고 과제도 꼬박꼬박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같은 학년에 동기가 없어 정보가 부족했다.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이들 중 마음씨 착한 선배들을 찾아가 모르는 것을 물어보며 친하게 지냈다. 덕분에 나의 복학은 잘 시작됐고 앞으로도 쭉 그렇게 진행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복학한 후배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는데 내 소개를 받은 후배가 이렇게 말했다.
"아~ A형 형수님?"후배는 반갑다며 얼굴을 활짝 펴며 웃는데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선배가 아니라 형수라고? 그것도 A형 형수? 후배가 말한 선배 A는 내 복학을 도와준 도서관 착한 선배였다. 순간 난 몰랐던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선배 A가 날 좋아한다고 과에 소문이 다 났다는 것.
그리고 내가 선배 A와 사귀는 사이라면, 우리 과 남자들은 날 '형수님' 또는 '제수씨'로 부른다는 것.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과에 소문이 다 나도록 어느 누구도 나에게 귀띔을 해주지 않았다. 나는 과에서 이방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