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개척단 이정남씨
남소연
③ 중앙부처인 보건사회부가 충남도에 보낸 공문 중, 1970년 7월 21일 "본 농지는 당초 정착민의 자활을 위하여 국유지를 임대 정착민에게 가분배한 것"
④ 1960년대 중반 서산군에서 작성한 '서산자활정착사업장현황' 중"농지를 분배하여 7년간이란 세월을 다만 이를 바라고 간신만고(艱辛萬苦)하여 온 입주계민(入住繼民)들의 숙원(宿願)을 풀어주고자 함. 만약 아무 대가 없이 이를 요구한다면 이들의 꿈은 깨어질 뿐 아니라 커다란 파동(波動)이 야기될 것으로 사료됨."
뿐만 아니었다. 같은 시기, 개척단 출신 타지 거주자들이 보낸 진정서도 빗발쳤다. 자신도 분배 대상이니 자격을 인정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지자체 관계 부서는 진정서 접수 결과를 구체적으로 작성해 수용 여부를 결정하기도 했다.
○ 인지면에서 서산군에 보낸 진정서 검토 결과, 1969년"본 건 진정인 김○○은 1962년 1월경 자활정착사업장에 정착하여 거주 중 1964년 4월경 무단 가출하여 그 후 현재까지 거주 사실이 없는 자임. 그러므로 진정인은 1964년부터 정착민으로 인정되지 않는 자로서 농지 분배 위원회의 결의에 의거 농지 분배 대상자로 책정할 수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우리가 조금만 똑똑했으면 달랐을까"분배 자격은 곧 서산개척단 정착민으로서 얼마의 기간 동안, 어떻게 기여했는가에 달려 있었다. 그만큼 분배 절차는 구체적이고 까다로웠다. 진정을 처리하기 위한 회의록과 결재 공문이 상하 부처를 오갔다. 개척단원들이 '내 땅'에 대한 자격을 믿어 의심치 않은 배경 중 하나였다.
국민권익위원회는 2011년 9월 서산개척단 관련 의결에서 "근로기준법 상 노임의 통화지급 원칙에도 불구하고 (중략) 법적 근거 없이 양곡으로만 노임이 지급되는 등 제도 상 생활보호법 및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있었다"며 개척단원들이 대가 없는 강제 노역에 동원 됐음을 밝힌 바 있다.
이렇듯 착취는 있었으나 보상은 없었다. 통화지급원칙. 국가는 돈으로 노역 값을 치르겠노라 했지만, 약속은 법전 안에서만 유효했다. 돈 대신 줄 것으로 믿은 내 땅마저 국가의 소유가 됐다. 무상분배를 위한 조사와 수차례의 회의, 그리고 '곧 네 땅이 될 것'이라 인증한 가분배증까지. 증거는 차고 넘쳤다.
앞서 언급한 서산개척단 '쌍둥이 사례'인 장흥개척단의 경우, 1965년 무상분배를 받았다. 당시 대통령령에 따라 '근로 구호의 대상자에게 우선적으로 무상분배할 수 있다'는 자활지도사업에관한임시조치법(1982년 12월 31일 폐지)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분배 대상자에게 '매립증'이라는 분배증을 나눠준 사실도 똑 닮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장흥에 (땅을) 나눠 주라고 했대. 거기는 우리랑 똑같거든. 눈곱만큼도 다르지 않아." 서산개척단 출신 농민들이 땅만 생각하면 밤중에도 일어나 가슴을 치는 이유다. 정영철씨는 빚으로 경작 중인 자신의 땅을 바라보며 눈물을 찍어냈다. 그는 장흥개척단의 사례를 이야기하며 "우리가 조금이라도 배웠으면"이라는 말을 자주했다.
"우리가 조금만 더 똑똑했으면.""그때 등기라도 해달라고 하는 것인데..." 배우지 못해 속았고, 땅을 빼앗겼다는 한탄이었다. 장흥개척단이라고 더 '똑똑해서' 땅을 받았을까. 정작 '똑똑하게' 일을 처리했어야 할 책임 주체는 어떤 해명도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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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만 안 들었지, 정부가 50년 동안 강도짓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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