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청궁 전면의 모습경복궁을 재건할 당시 고종과 왕비 민씨가 비밀리에 짓다가 많은 반대 상소가 있었지만 끝까지 지었다. 궁궐이 아니라 사대부 집 구조로 지어졌다.
김광철
안동김씨 외척 세력들의 세도 정치에 의하여 왕권이 땅에 떨어진 것을 개탄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둘째 아들을 내세워 익종비 조대비와 밀약을 하고 자신의 아들을 철종의 양자로 입적을 시켜 왕의 생부로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어린 자신의 아들 고종을 대신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발호하는 외척 세력들을 누르기 위하여 다양한 정책을 실시한다. 그 중의 하나가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나서 300년 가까이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경복궁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각계각층으로부터 원납전이라는 명목으로 기부금을 받았고, 4대문을 통과하는 우마차에는 통행세를 부과하기도 하고, 결두전을 신설하여 혼인한 모든 백성들에게 인두세도 징수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화폐가치보다 백 배나 되는 당백전을 찍어내어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화폐의 유통질서를 어지럽혀 사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경복궁 타령'이란 노래가 불려졌겠는가?
그렇지만 요즘 와서 평가를 해 본다면 그렇게 임진왜란 때 불타서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을, 그것도 7800여 칸으로 자금성을 방불케할 정도의 엄청난 규모로 복원을 해 놓았기 때문에 요즘 우리나라를 찾고 있는 중국, 일본은 물론 많은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이란 나라의 문화의 뿌리가 그렇게 허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것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