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서 웬 불경 소리? 땅속을 파보니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왕국의 태동 ④] 굴불사지와 석불상

등록 2018.01.30 11:27수정 2018.01.30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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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이 순교했을 때 날아간 머리가 떨어졌다는 백률사. 법흥왕 이후 신라는 불교왕국으로 번성했다. 소금강산 울창한 대숲 인근에 지어진 백률사의 모습을 상상과 현실을 결합해 그렸다. ⓒ 이건욱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을 지나 백률사(栢栗寺)로 오르는 길.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경주 동천동에 자리한 소금강산은 험하고 높은 산이 아니다. 그러나, 평소 등산이나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았기에 오르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빼곡히 대나무가 들어찬 숲 아래서 숨을 골랐다. 계절과는 상관 없이 청아한 대나무의 푸른 빛깔이 지친 마음과 산을 오르는 스트레스를 위로해줬다.


오가는 사람들이 드문 산길. 잠시 잠깐의 조용한 휴식 속에서 <논어> 자로편(子路篇)의 인상적인 구절이 옛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기신정 불령이행 기신부정 수령부종)'.

법흥왕과 이차돈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당한 문장이었다. 이를 풀어서 해석하면 "옳은 뜻을 가진 자는 애써 명령하지 않아도 따르는 사람이 있으나, 그렇지 못한 자는 명령을 해봐야 그것에 따르는 이가 없다"가 아닌가.

6세기 초반. 법흥왕은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을 강화하고,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불교의 공인을 위해 누군가 나서 희생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을 버리라고 말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기에.

스물한 살 청년 이차돈은 법흥왕이 '옳은 뜻'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랬기에 순교를 자처할 수 있었다. 명령을 받지 않고도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것이다. 바로 이 법흥왕과 이차돈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신라가 불국정토로 가는 길을 열었다.


설화에 의하면 백률사는 순교자 이차돈의 베어진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자리에 지어졌다. 백률사 주위에는 지조를 상징하는 대나무가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차돈의 삶과 죽음, 그것과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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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백률사는 대웅전과 요사채로 이뤄진 작은 규모의 절이다. ⓒ 이용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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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로 오르는 소금강산 초입엔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 이용선 제공




현재는 작은 사찰... 옛날엔 '불교 성산'으로 불려

신라의 불교 공인에 큰 역할을 한 이차돈과 관계있는 사찰이니 백률사의 위상은 그 어느 절보다 높았다. 또한, 경주 사람들은 불력에 의한 영험한 기적이 자주 일어난 곳으로 백률사를 기억한다. 그래서일까? 전해오는 옛이야기 또한 많이 간직한 장소가 소금강산과 백률사다.

절이 세워진 소금강산 기슭에는 앞서 말한 대로 '석조사면불상'이 위풍당당하게 솟아 있다. <삼국유사>는 이 독특한 불상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신라시대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기 위해 소금강산에 이르렀다. 왕의 행렬이 어느 한 지점을 지날 때 땅속에서 불경 소리가 들렸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경덕왕의 신하들이 땅을 파자 커다란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은 바위의 사면에 불상을 새기라고 명했고,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절의 이름인 굴불사는 땅에서 불상을 파냈다는 의미다."
굴불사는 이제 터만 남았다. 하지만, 높이가 3m에 육박하는 바위에는 그때 새겨진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 '관세음보살입상(觀世音菩薩立像)' 등이 아직도 남아 이곳이 신라불교의 성지 중 한 곳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멈췄던 발걸음을 재촉해 백률사 입구 계단에 도착했다. 1천 년 전 창성했던 사찰의 흔적은 많은 부분 사라졌다. 현재의 백률사는 대웅전과 요사채 정도만으로 이뤄진 작고 소박한 사찰이다. 절을 찾은 사람들에게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와 떨어졌다는 장소가 대략 어디쯤인지를 물었으나, 시원스러운 대답을 들려주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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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대숲을 지나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이차돈의 순교설화가 살아 숨 쉬는 백률사가 기다리고 있다. ⓒ 이용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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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임을 알리는 비석이 사찰 계단 아래 세워져 있다. ⓒ 이용선 제공




이차돈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나 '정신'은 남아

동국대학교 강석근 교수의 논문 <백률사 설화와 제영(題詠)에 대한 연구>는 백률사가 건립될 당시의 상황과 역사적 위상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다소 길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대로 인용한다.

"경주의 소금강산(해발 177m)에 있는 백률사는 신라 불교의 대표 유적지다. 아울러 이 절은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와 함께 이차돈의 순교 현장이다. 법흥왕 14년(527년)에 불교가 공인된 이후 이차돈은 법흥왕과 함께 불교 공인의 주인공으로 병칭돼 왔다. 이차돈은 스스로 불교를 위해 참형을 받았다. 그때 그의 목이 날아가 소금강산에 떨어졌고, 목에서는 흰 젖이 솟아나는 이적(異跡)이 일어났다. 이후 신라의 이차돈 추모자들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소금강산에 백률사를 세우고, 산정에 무덤을 조성했다. 이후 해마다 이차돈의 기일인 8월 5일이 되면 추모자들이 무덤가에 모여 제사를 올렸다. 이 같은 이차돈 추모의 전통과 열기는 고려 후기까지 지속됐다. 백률사는 이러한 역사적·설화적 배경을 가진 한국 불교의 성산(聖山)이다."
요사채 앞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 백률사 경내와 주위를 찬찬히 돌아봤다. 절의 이름을 알려주는 비석을 발견했고, 그 풍경 속으로 다가온 이름 모를 새의 청명한 울음소리를 들었다.

대웅전 앞뜰엔 무슨 행사가 준비되고 있는 것인지 하얀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대웅전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석벽에 삼층탑이 오목새김(음각) 돼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유심히 살폈으나 몇 세기에 걸친 세월과 세파에 닳아 그 형상을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다.

백률사 범종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새겨져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차돈 순교비' 또한 백률사에서 발견됐다.

한국고대사탐구학회가 발행한 이도흠의 논문 <이차돈의 가계와 신라의 불교 수용>에선 이차돈의 죽음을 "이중적"이라고 적고 있다. "법흥왕과의 사적 관계를 감안할 때 이차돈의 죽음은 불교 공인을 위한 자발적인 순교인 동시에 형벌이기도 했다"는 것.

관련 서적과 논문을 읽고, 그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는 현장을 찾아다닐수록 이차돈에 관한 궁금증은 커져만 가고 있었다. 백률사 북쪽에 있다는 '삼존마애불좌상'을 찾아 다시 산길을 걸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숲에선 어리고 착한 짐승이 울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에 게재된 내용을 일부 보완한 것입니다.
#이차돈 #백률사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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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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