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안 맞는 사람, 엄마와 유럽 여행을 갔다

[위기의 주부] 만나면 싸우는 모녀의 이탈리아 여행... 우리가 안 싸운 비결

등록 2018.02.09 17:04수정 2018.11.02 16:14
1
원고료로 응원
엄마와 아내에게 요구되는 역할과 갈등하고 불화하는 '위기의 주부' 이야기입니다. 정체성의 혼란과 번뇌를 글로 풀어보며 나의 언어를 찾아가려고 합니다. [편집자말]
얼마 전 엄마가 수술을 받으셨다. 엄마는 부정맥 증상으로 4년 넘게 약물치료를 해왔고, 작은 시술을 받았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최근엔 이완기 혈압이 위험 수준으로 떨어지셨다. 더 이상 약이 먹히지 않는 엄마의 몸. 주치의는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며 '인공심장박동기삽입술'을 권했다.

어쩌다 엄마와


피렌체   '딸 덕에 유럽 다녀왔다'라고 내세울 엄마의 추억을 위해, 그간 못한 효도를 위해, 역사적 사명을 띠고 비행기에 올랐다.
피렌체 '딸 덕에 유럽 다녀왔다'라고 내세울 엄마의 추억을 위해, 그간 못한 효도를 위해, 역사적 사명을 띠고 비행기에 올랐다. 신나리

지난해 가을, 엄마와 여행을 다녀와서 다행이다. 그때 가지 않았더라면 기약 없이 또 몇 년이 흘렀을 거다.

엄마와 여행은 없던 계획이었다. 남편이 장기 휴가를 냈고 가족여행을 가려 했지만 네 살배기를 데리고 갈 데가 마땅찮았다. 그러다 문득 떠올렸다. 엄마와 유럽여행을 가면 어떨까? 유럽 성지순례는 엄마의 오랜 꿈이었지만 아빠는 협조하지 않았고, 빡빡한 여행사 패키지도 엄마 체력에는 무리였다. 한번 유럽여행을 다녀온 내가 엄마를 모시고 자유여행을 간다면? 남편이 아이를 봐줄 수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엄마에게 말을 꺼냈다. 놀라워하고 기뻐했지만 고민하셨다. 엄마 나이 68세. 심장도 안 좋고 무릎도 안 좋지만 고려해보겠다던 엄마는 며칠 후 못 가겠다고 하셨다.

"지금도 밤에 잠을 못 자. 뭣보다 너랑 나는 사흘만 지나면 죽자고 싸우는데 네 성질 받아 가며 여행할 자신 없다." 

맞다. 잊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사이가 좋지 않다. 시한폭탄 같다. 한 지붕 아래에 있다 보면 이틀을 못 넘기고 끓는점 직전까지 오른다. 아슬아슬 유지하다 사소한 말꼬리가 퐁당 들어가면 폭발한다.


"엄마 그게 아니라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너 같은 걸 왜 낳아서 이런 대우를 받냐. 지금 (밤 11시) 짐 싸서 내려가겠다." 

이러고서 두어 달 후 만나 또 지지고 볶고. 평상시엔 부딪히지 않기 위해 짤막한 안부 통화만 하고 대화를 극도로 자제한다. 어떻게 열흘간 해외여행을 하겠다는 건지.


비행기 탄다며 철없이 설레던 마음을 꾹꾹 접었다. '안 그래도 준비하려니 귀찮았는데 차라리 잘 됐어. 엄마가 못 가겠다고 해주니 속 편하다.' 그런데 며칠 지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안 가려니까 우울해져. 이것도 하느님이 주신 기회가 아닐까? 너와 화해하라고." 

3주 후에 떠나기로 하고 항공권과 숙소, 현지 투어를 예약했다. 14년 전 가봤던 로마의 거리를 감감히 떠올리며 일정을 짰다. 10년 동안 모은 항공 마일리지를 털었고, 엄마는 쌈짓돈을 꺼냈고, 남동생 부부와 아빠가 돈을 보태주었다. '딸 덕에 유럽 다녀왔다'라고 내세울 엄마의 추억을 위해, 그간 못한 효도를 위해, 역사적 사명을 띠고 비행기에 올랐다.

정말 (많이) 안 싸웠다

 다행히도 이탈리아에서 우리는 정말 (많이) 싸우지 않았다. 비결은 ‘사적인 대화 적게 하기’였다.
다행히도 이탈리아에서 우리는 정말 (많이) 싸우지 않았다. 비결은 ‘사적인 대화 적게 하기’였다. 신나리

엄마를 인터뷰 하려 했다. 꾹꾹 눌러온 이야기들을 내가 듣고 기록해보고 싶었다. 피렌체 아르노 강이 보이는 카페, 로마의 스페인 광장 한편에 앉아 진솔하게 주고받는 대화, 그럴듯해 보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터뷰는 실패했다. 인터뷰의 기본 자세는 상대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듣는 존중과 경청일 텐데 그러기엔 엄마에 대한 나의 감정이 복잡했다. 나는 엄마와 대화를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돌아가신 이모할머니에게 겪은 시집살이부터 아빠에 대한 원망까지 족히 오십 번은 들었을 레퍼토리가 반복될까 긴장했다. 섣불리 말문을 열었다가 언성이 높아지고 여행을 망칠까 겁났다.

매일 통화하며 일상을 털어놓는 친구 같은 모녀 사이를 바랐던 엄마에게 나는 무뚝뚝하고 무심한 딸이었다. 사춘기 시절부터 방에 틀어박혔고 멋대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통보했다. 엄마는 불만이었다.

"너는 정말 속을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말을 해야 알지." 
"엄마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지도 않았잖아." 
"그래서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거냐?" 

나도 항변했다. 싸움은 늘 이렇게 시작됐다.

다행히도 이탈리아에서 우리는 정말 (많이) 싸우지 않았다. 비결은 '사적인 대화 적게 하기'였다. 자유여행이었지만 매일매일 '현지 한국인 가이드 투어'로 빡빡하게 채웠다. 아침 6시부터 숙소를 나섰고 가이드의 정신없고 빠른 말을 듣고 적고 대답하고 질문하느라 정신없었다.

잠깐씩 쉴 땐 입도 뻥긋하지 않았고 숙소에 들어오면 지쳐 씻고 잠들기 바빴다. 서로 심사를 꺼낼 틈이 없던 덕에 부딪힐 일도 적었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지금 어디를 간다. 앞으로 어디를 간다. 뭐를 먹자. 몇 시다. 다리가 아프다" 정도였다.

희희낙락 다니진 않았다. 체력 약한 엄마에게 맞춰주다 일정이 어긋나기도 했고, 나의 준비 부족으로 길을 헤매기도 했고, 끼니때가 넘도록 밥을 못 먹기도 했다. "엄마 때문에 이렇게 됐잖아"라고 말한 적이 두 번쯤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엄마는 발끈했다. 내가 더 우기면 이대로 공항으로 직진할지도. 심호흡 한 번 하고 무마했다. "어쩔 수 없지 뭐, 완벽할 순 없잖아?" 몇 번의 아슬아슬한 전쟁을 피했다. 피곤이 쌓이고 짜증이 머리끝까지 찰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탓이 아니야

로마  부모님이 나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이끌지 않았기에 내가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로마 부모님이 나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이끌지 않았기에 내가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신나리

로마에서 피렌체로 가는 기차 안, 그러니까 드디어 엄마의 길고 긴 하소연이 시작되었다. 주제는 '엄친아', 엄마가 부러워하는 남의 집 자식들.

"김 교장네 아들이 7급 공무원 되었다고 하더라. 며느리도 선생 며느리를 그렇게 찾더니 선 몇 번 보더니 중학교 영어 선생으로 맞았는데 그렇게 예뻐 죽겠다네. 권 선생 딸이 아버지에게 그렇게 고맙다고. 교사 되라고 해서 다시 공부해서 됐는데 그렇게 좋다고." 

엄마는 공무원이나 교사가 된 남의 집 자식들을 가장 부러워한다. 왜냐. 엄마 자식들은 못 했으니까. 아빠는 초등학교 교사로 36년을 재직하셨고 인맥의 대부분은 교사들로, 자녀들도 최소한 한 명은 교사가 되었다. 부모가 교사로 사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면, 부모의 삶을 존경한다면, 자식도 교사가 안 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엄마의 지당한 논리였다.

무난하고 안정된 삶을 살기엔 교사만 한 직업이 없다고 부모님은 말하곤 하셨다. 개성과 자유의 물결이 춤추던 1990년대, '평범하게 살라'는 말은 나에게 고루하게 들렸다. 사범대나 교대를 가라, 교직 이수를 하라는 부모님의 요구를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안 하고 제멋대로 사는 자식, 엄마는 이를 두고 자식 교육 '실패'라고 명명하셨고 '자식 자랑할 게 없다'고 한숨 쉬셨다. 내가 회사 그만두고 집에 '눌러앉은 후'로는 더 심해졌다. 교사가 되었으면 이럴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라며.

"엄마 이제 와서 소용없는 이야기를 왜 자꾸 해?"
"네가 사는 모습이 딱해서 그렇지!"
"선생은 뭐 편한 줄 알아. 온종일 애들 가르치고 집에 와서 혼자 살림 다 해."
"그럼 좋은 거지 뭐가 문제인데? 애 키우면서 그만한 직업이 어디 있어."

나는 불만이다. 엄마는 왜 남들의 시선, 남들이 좋다는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하실까. 엄마는 '결혼 안 해도 돼, 애는 안 낳아도 돼'라거나 '네가 뭘 하든 믿는다' 혹은 '네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걱정하거나 지나간 일 되씹으며 후회하셨다.

엄마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한 선택과 결과에 약간의 후회가 있긴 해도 엄마가 잘못 가르쳐서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똑같이 키웠지만 너무도 다른 남동생이 그렇듯 말이다.

난 내 인생을 스스로 정해 왔다고 생각하고 결과를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고 부모에 대한 원망 역시 추호도 없다. 부모님이 나의 손을 잡고 이리저리 이끌지 않았기에 내가 이만큼이라도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남의 집 자식들이 공무원 되고 선생 되는 게 그렇게 부러워?" 
"그래 부럽다." 

엄마는 왜 그러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창밖을 내다봤다. 피렌체로 가는 기차 안, 우리는 마주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시간을 더 보냈다.

여행에서 다녀와 읽은 책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쓰여 있었다. 

"엄마는 내가 일종의 거울이 되기를 바라셨죠. 엄마가 보고 싶은 자신의 이미지, 완벽하고 온전히 사랑받고 언제나 옳은 모습으로 비춰 주는 그런 거울 말이에요. 하지만 나는 거울이 아니고, 엄마 눈에 결점으로 보이는 것들도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 엄마가 계속 그렇게 나한테서 기적을 바라는 한 나는 절대 그것에 맞출 수가 없어요." - <멀고도 가까운>(리베카 솔닛)


엄마와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

아씨시 이탈리아  나는 종종 물었다. “엄마, 왜 그렇게 참고 살았어. 나 같으면 집 나갔을 거야.” 그러면 엄마는 대답했다.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줄 알았어.”
아씨시 이탈리아 나는 종종 물었다. “엄마, 왜 그렇게 참고 살았어. 나 같으면 집 나갔을 거야.” 그러면 엄마는 대답했다.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줄 알았어.” 신나리



엄마와 나는 다른 줄 알았지만 여행 가면서 알았다. 엄마는 옆자리에서 부스럭대기만 해도 잠에서 깼고 나 역시 잠자리가 바뀌면 깊은 잠을 못 잔다. 그렇게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한 삼 일간, 새벽에 누가 화장실 물이라도 내리면 화들짝 깨어버려 새벽 3, 4시부터 뜬 눈으로 날 새기를 기다렸다. 예민한 게 똑 닮았다. 그뿐인가. 다혈질, 급한 성미, 자존심도 세다. 그렇기에 우린 그토록 싸운 것이다.

어느 면에선 다르다. 나는 화가 나면 바로 받아치는 편이지만 엄마는 가슴에 응어리를 남기는 분. 엄마는 참는 사람이었다. 몸이 아플 때도 밥상을 차렸고 살림과 자식을 두고 집을 비운 적도 없으셨다. 남에게 싫은 소리도 못 했다. 남들의 시선, 체면도 중요했다. 엄마가 유지한 화목의 방식이었고 나는 우리 집이 꽤 행복한 가정이라고 생각했다.

차남이지만 장남이 되어야 했던 아빠와 살며 견뎌야 했던 시집살이. 빠듯한 살림에 자식들을 타지에서 교육하느라 했던 고생, 다시 공부를 시작하시며 좋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난 몇 년간 벌어진 사건들은 엄마의 능력을 넘어섰다. 엄마는 자주 아팠고 자주 화를 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내가 아기를 낳고 키우느라 정신없던 때와 정확히 겹쳤다.

하나밖에 없는 '딸년'은 하소연을 받아주지 않았고 아빠는 분명 자상했지만 꼬치꼬치 엄마를 가르치며 속을 박박 긁었다. 의지했던 건 생신 때마다 편지를 잊지 않던 효자 아들이었는데, 멀리 장가 가버렸다. 아무도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겉으로 화목해 보이면 그뿐이었다. 엄마가 언제나 늘 그렇게 있을 줄 알았으니까.

나는 종종 물었다.

"엄마, 왜 그렇게 참고 살았어. 나 같으면 집 나갔을 거야."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줄 알았어." 

엄마는 가슴 속에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쌓이다 심장이 고장 나 버린 건 아닐까. 작은 버튼만 눌러도 맥박이 주체 없이 펄떡이게 되어 버렸다. 심방세동의 또 다른 병명은 '화병'이라고 나는 진단했다.

아빠에게 당부했다. "엄마를 화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엄마가 무슨 말을 하든 '알았어' 그리고 '미안해' 이 말만 하세요. 어떤 토도 달지 마세요."

엄마가 짊어진 채 살아온 세월의 짐은 식구들이 나눠 매야 할 짐이 되었다. 평생 엄마의 맞춤 내조를 받아온 아빠는 이제 엄마의 돌봄 담당자가 되어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시고 병원 간이침대에 누워 주무신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나는 엄마의 보호자였다. 엄마는 온전히 의지했고 나는 보필했다. 아침저녁으로 호텔 주방에 내려가 뜨거운 물을 달라고 해서 엄마에게 날라드렸고. 거리에선 엄마의 손을 놓치지 않게 꼭 쥐고 보폭을 맞춰 걸었다.

"어머니의 불행은 내가 끌고 가야 할 썰매라고 생각했다.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어머니를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해, 그 썰매를 끌면서 곰곰이 살폈다." - <멀고도 가까운>(리베카 솔닛)

그리고 엄마에게 대한 글을 쓴다. 엄마를 가볍게 하기 위해, 나를 가볍게 하기 위해. 엄마와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 중복게재했습니다.
#엄마와여행 #유럽여행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 기사는 연재 위기의 주부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1만2000 조각 났던 국보, 113년만에 제모습 갖췄다 1만2000 조각 났던 국보, 113년만에 제모습 갖췄다
  3. 3 [단독] 김태열 "명태균이 대표 만든 이준석,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단독] 김태열 "명태균이 대표 만든 이준석,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4. 4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수능 도시락으로 미역국 싸 준 엄마입니다
  5. 5 대학 안 가고 12년을 살았는데 이렇게 됐다 대학 안 가고 12년을 살았는데 이렇게 됐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