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키스탄의 알라우딘 호수 (해발 3,300m)뱀을 두려워하던 초보여행자는 10년 후, 해발 3,000미터는 별 고민없이 오르는 트래커로 성장합니다.
정효정
다음날 아침, 방안에서 웅크리고 누워 비 오는 소리를 들었다. 창문을 열어 보니 병풍처럼 서 있는 달마산이 보였다. 서울에선 전화벨 소리만 들리면 눈물부터 날 정도로 불안정했지만, 이곳에서는 눈물 흘릴 일이 없었다. 어제 서울을 벗어난 후로 쭉 혼자였고, 버스기사님이나 절에 계신 분들과 꼭 필요한 대화만 나누었을 뿐이었다.
아침 공양 후, 설거지를 좀 돕고 하산을 알렸다. 절에서 일하는 보살님은 삶은 감자를 비닐봉지에 싸서 내 손에 들려 주었다. 비닐봉지에 송송 맺힌 온기에 몸둘 바를 모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중학생 여자아이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언니 나이가 되면 혼자 여행해야지." 혼자 어디서 자야 할지도 모르는 초보 여행자였지만, 14살 아이 눈에는 24살의 내가 사뭇 대단해 보였나 보다. 나는 '언니 나이'라는 말을 곱씹었다. 24살이 될 때까지 스스로 한 번도 어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는 '그래도 어른'인 것 같았다. 나에 대한 책임과 권리는 온전히 내게 있었다. 마치 어제의 내가 아무에게도 물어보지 않고 혼자 서울을 떠난 것처럼. 어쩐지 섭섭하기도 했고 또 한편으론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첫 여행은 시작되었다. 어리버리하던 초보 여행자에게 흔쾌히 잠자리를 허락해 주었던 미황사분들 덕분이었다. 물론 그때 며칠 혼자 여행 했다고 많은 것이 변하진 않았다. 우리는 언제나 인생의 강력한 한방을 원하지만, 사실 한 번의 여행으로 어디 삶이 쉽게 변하겠는가.
하지만 뱀이 나올까 살피며 걷던 그날의 산책이, 아침 안개가 자욱하던 달마산이, 가만히 울리던 풍경소리가, 방금 쪄내서 따뜻하던 감자 세 개의 온기가... 이 모든 것들이 스크래치가 잔뜩 나 있던 직장초년생의 마음을 달래 준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가슴 속 크고 작은 상처들을 메우며 내 삶의 결을 형성하는 것도. 그땐 몰랐지만 돌이켜보니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