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옥상 화백과 한신대 교정에 세워진 늦봄 문익환 목사 시비.
권우성
- 여기 한신대 신학대학원 캠퍼스에 '잠꼬대 아닌 잠꼬대' 시비도 만드셨어요. "문익환 기념사업회에서 시비를 만들자는 제안이 왔을 때 정말 행복했어요. 저는 늘 목사님을 존경하고 따르던 사람이잖아요. 다만 문익환 목사님을 제가 작품으로 제대로 모실 수 있을까가 부담이 됐죠. 시를 무엇으로 할지는 제가 직접 정했다. 제가 그 시를 제일 좋아하기도 하고 분단 극복의 이정표와 같은 멋진 시잖아요."
- 그런데 중간에 누군가에 의해 놋쇠가 뽑히고 구부러지는 등 훼손이 됐어요. "너무 마음이 아프죠. 사실 도라산역이 막 뚫렸을 때 이 시비가 위치하기를 기대했었는데 좌절된 게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개방된 장소에 설치되어서 만족했거든요. 신학대학 부지이긴 하지만 운동장 한편에 있는거니까 많은 주민들이 접할 수 있었고요.
이명박 박근혜 때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면서도, 부끄러움을 못 느끼는 파렴치한 인간들이 도처에서 나타났어요. 안타까운 일이죠. 일개 시민이 해병대를 자칭하고 군복을 입고 나타나질 않나..."
- 그 이후에는 보호가 잘 되고 있나요?"좀 만진 다음에 자리도 옮기고 유리도 씌웠어요. 유리는 좀 안 씌웠으면 좋겠는데... 보존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 문화는 손 하나도 안 대고 영원히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있는 걸 원하는 게 지배적이에요."
- 마모가 되어도 괜찮다는 거죠?"그럼요. (작품이) 세월에 맞서는 것은 틀린 생각이죠."
"시건방지게 이 사회 어떻게 해보려고 한 적 없어"- 혹시 저희가 모르는 문익환 목사님을 다룬 작품이 있었나요?"그렇게 특정한 분들을 부각시키는 작업은 제 작품 정신과 떨어지죠. 저는 민중 중심이에요. 영웅주의가 아니에요."
- 문 목사님을 다룬 작가님의 작품의 주제는 '통일'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통일이라는 주제엔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세상을 크게 봐야 해요. 크게 보려면 철학과 세계사적인 안목 등 인문학적인 소양이 갖춰져야 하고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해요. 자기성찰의 시간이 중요한데 지금 그런 것들이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있잖아요. '네 앞에 있는 네 문제 해결부터 해라'는 식으로 내몰리고 그런 '극한 의식' 속에서 젊은이들이 현실적으로 남을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은 좁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세계가 평화롭지 못하면 경제가 잘될 수 있나요? 또 이웃과 사랑 나누지 않으면 인생이 도대체 뭡니까? 우리는 지금 '섬'에 갇혀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 통일에 대한 시각도 그렇고, 작가님 스스로 '문익환의 길'을 가는 중이라고 여기시는지요?"저는 사회에 기여를 하겠다, 이런 생각을 처음부터 했던 건 아니에요. 살다 보니까 '이건 아니지 않냐' 싶었던 것뿐이죠. 시건방지게 이 사회를 어떻게 해보려고 했던 적이 없어요. 제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거라는 생각도 안 하고요. 마찬가지로 문 목사님의 훌륭하신 삶을 따르고 쫓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되는 게 아니라, 어떤 자장 속에서 자연스럽게 가는 게 아니겠어요. 나도 모르고 그냥 떠오르고 그 길로 가게 만드는 것이고, 그게 바람직하겠죠."
- 추후에 분단 극복을 위한 퍼포펀스 계획 있으세요?"계기가 되면 해야 된다고 늘 생각합니다. 당연히."
-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어 내실 겁니까?"의도하거나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몸 전체로 읽는 그런 것입니다. 말로 하자면 많은 사람들과 아픔·연민을 나누면서 동고동락할 수 있는 그런 사회에 대한 열망이 작업으로 표현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잠꼬대 아닌 잠꼬대
문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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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산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 마음이었거든 한 마음 그래 그 한 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 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 안고 평양 거리를 뒹굴겠지 사십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서로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며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 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만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 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구 객적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것 말이야 된다는 일 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 줄 아는가 아니라구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을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사는 거지 1989년 첫 새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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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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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품이 정말 청와대로..." 그림으로 문익환-문재인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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