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YWCA '미투 운동' 지지 장미행진3.8 여성의 날 '미투 운동' 지지와 성폭력 근절을 위한 YWCA행진이 8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거리에서 한국YWCA연합회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권우성
10년 전, 고등학생이던 나는 학교에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공부를 싫어한 것도, 친구들과의 관계가 어그러진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왜 이렇게까지 공부를 열심히 해야하는지, 내게 동의를 묻지도 않은 교칙을 왜 잘 지키며 생활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교지를 만드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학교에 딴지를 걸기도 하고 몇 선생님을 찾아가 물어보기도 했다. 돌아보면 '그때가 가장 강성이었군' 싶을 정도로 거침없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던 한 가지가 있었다. 남자 교장선생님(아래 교장)의 지속적인 성추행이었다.
당시의 나는 교장실 청소를 맡았다. 나 말고도 몇 명의 여학생들이 함께 했다. 청소하는 곳들 중 교장실은 나름 '꿀'이라고 여겨졌다. 가끔 교장실에 손님이 있는 날에는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되고 먼지가 크게 쌓일 일이 없는 공간이었다. 그런 공간에서 교장은 청소하는 여학생들의 엉덩이를 늘 툭툭 쓰다듬었다.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그 교장은 복도에서도, 계단에서도 만나는 여학생들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나는 불쾌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왜였을까.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시간은 흘렀고 어느덧 나는 고3이 되었다. 그때도 교장은 어김없이 엉덩이를 치고 다녔고 그러던 중 고1 여학생이 울면서 양호선생님께 찾아가 그 일을 털어놓게 된다. 이 얘기를 들은 양호선생님은 교장에 문제제기를 했고 그때서야 교장은 해당 학생에 사과를 했다. 나는 이 일을 접하면서 통쾌함보단 자책감에 휩싸였다. '피해를 당했던 내가 문제제기를 했더라면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과 동시에 '나는 왜 문제제기할 수 없었는가'에 대한 원망이었다.
아마 그 당시 '손녀'이자 '딸'이기에 소위 엉덩이 한 번 치는 건 괜찮다고, 불쾌감을 느꼈다면 피하는 게 우선이어야 한다는 무책임하고 더러운 인식 속에서 나 역시도 헤매이고 있었던 것 같다. 그치만 그럼에도 아무 말 못했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피해자이자 방관자가 된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이런 경험은 비단 나만의 한정된 경험은 아닐 것이다. 미투 운동은 여성들에게 여러 감정을 던져주곤 하는데 이는 단순히 지금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에 대한 분노 뿐만 아니라 피해자로서의 '위축된' 경험을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지난날 경험의 소환과 함께 '그때의 용기없음'이 무겁게 다가온다고 한다. 그러나 '용기있음'의 기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학 내 성추행 사건을 문제제기하고, 재판으로 넘어간 해당 남학생이 벌금형을 받자 우리 과 교수님은 그 사건의 피해자 대리인이었던 내게 말했다.
"같은 학교 친구들끼리 친하게 지내지 그랬어."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정치한때의 나는 학위나 경력 등 새로운 능력치를 얻게 되면 여성인 내게 벌어지는 폭력적인 상황들에 대해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내가 알게 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피해자로서의 경험과 관점은 끊임없이 사소화되고 이미 남성화된 기준에 맞는 (존재하기 어려운) '타당한 증거'를 내놓아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그런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대하게 된 것은 정치였다. 일대일의 싸움이 아닌, 나의 경험과 관점을 공론장에 이끌어내고 정책화시키는 일. 정치에 참여하고 뛰어들어 사회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개입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2018년 3월 4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한국여성대회에서 한 여성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재판이 아니라 제도와 정치"라고. 피해자가 본인의 얼굴을 드러내고이름을 밝히며 가족과 지인까지 털려야 하는 지금의 상황은 절대 공정치 않다. 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대신해 싸워줄 누군가를 찾는 것, 그리고 그 제도를 만들어내는 것은 정치여야 한다.
일각에서는 지금의 미투 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왜 우리는 정치적으로 사유하면 안 되는가. 지금의 정치가 누구의 언어로만 사유되어 왔기에 우리의 외침과 발언이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는, 타자화된 설명을 당신들이 덧붙이는지 묻고 싶다. 이처럼 지금의 판을 활용해내고 싶은 나는 미투 운동을 통해 지금의 여성들이 마주한 상황뿐만 아니라 10년 전, 숱한 성추행에도 말하지 못한 나와 울면서 양호선생님을 찾아갔던 그 학생, 그리고 지금의 청소년들을 만나고 싶다.
미투를 외치는 우리, 청소년 참정권에도 응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