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윤 독립지사가 동지들과 함께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 만주의 독립군들에게 군자금으로 보내기로 결의했던 장소, 달성공원의 풍경이다. 사진 가운데 높은 지점에 보이는 누각은 관풍루이다. 관풍루(대구시 문화재자료 3호)는 본래 경상감영의 정문이었는데 친일파 대구군수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훼철할 때 이곳으로 옮겨졌다.
정만진
손양윤은 신현규와 공모하여 1926년 6월 13일 오후 10시 30분 각자 조선식 칼을 가지고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면 오평동 32번지 기전정일(幾田精一)의 집에 침입, 가져간 칼의 등으로 기전정일을 여러 차례 구타하여 왼쪽 팔 상박부에 길이 5푼, 넓이 약 2푼, 깊이 약 6푼 및 길이 약 3푼, 넓이 약 5리, 깊이 약 3리의 전치 약 1주를 요하는 2개의 상해를 입히고, 또 동인을 허리띠 삼끈으로, 동인의 처 춘지(春枝)를 여자용 허리끈으로 결박하고 돈을 내놓으라고 강요하여 돈 105원, 엽총 2정, 명주실 약 100문, 호사사 약 30문, 신모사 소건 약 7척, 비스킷 약 100문 등을 강탈하였다.
1926년 음력 5월 7일 밤에도 신현규와 공모하여 식도와 권총 모양의 물건을 휴대하고 칠곡군 왜관면 매원리 348번지 이이창(李以昌)의 집에 침입, 가져간 흉기로 이이창의 앞가슴을 구타하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여 228원 23전과 안경 1개 등 여러 가지를 강탈하였다.
같은 해 8월 30일경 밤에 또 신현규, 이병묵과 공모하여 재차 이이창의 집에 침입했다. 2명은 안뜰에서 망을 보고 1명은 이이창에게 흉기를 들이대며 돈을 내놓지 않으면 살해하겠다고 위협하여 40원을 강탈하였다.
▲손양윤 지사 집터의 입구에 세워져 있는 담장과 지번 표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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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1월 19일에는 신현규, 이병묵, 손허와 공모하여 오후 10시 30분경 곤봉, 총기 모양의 물건을 가지고 왜관면 매원리 340번지 이상기(李相琦)의 집에 가서 2명은 집 밖에서 망을 보고, 다른 2명은 집 안으로 침입하여 권총 모양의 물건을 이상기의 앞가슴에 들이대며 돈을 내놓지 않으면 사살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동인을 구타하여 그의 왼손 무지(拇指, 엄지손가락)와 차지(差指, 둘째손가락) 사이에 전치 2주를 요하는 길이 약 1촌, 넓이 약 2푼의 열상을 가하며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여 118원을 강탈했고, 이어서 동인의 아버지 이지연(李志淵)도 협박하여 30원 20전을 강탈하였다.
2월 29일 오후 9시경에는 신현규, 이병묵과 함께 식도, 곤봉 등을 가지고 왜관면 매원리 416번지 이수연(李秀延)의 집에 가서 2명은 대문 밖에서 망을 보고 1명은 집 안에 침입하여 이수연의 어머니 장장곡(張長谷)에게 위해를 가할 기세를 보이며 협박을 가하여 돈을 내놓으라고 강요하였으나 이수연이 돈이 없어서 강취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3월 25일 오후 11시경에는 신현규, 이병묵, 손허와 공모하여 식도와 총기 모양의 물건들을 가지고 칠곡군 약수면 관호동 69번지 장일환(張日煥)에게 살해하겠다고 협박하여 370원 20전을 강탈하였다.
▲손양윤 독립지사의 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물류창고가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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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오후 10시경에는 신현규, 이병묵, 손허와 함께 각자 흉기를 가지고 경산군 남산면 경동 650번지 김두남(金斗南)의 집에 가서 2명은 문밖에서 망을 보고 다른 2명은 집에 침입하여 끈으로 김두남을 결박한 후 마침 집에 있던 공기총으로 김두남을 구타하며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여 800원을 강탈했다.
일제에 체포될 당시 손양윤 지사는 50세였다손양윤(1878∼1940)은 일제 경찰에 체포된 1929년 4월 당시 50세의 장년이었다. 그는 징역 20년을 언도받고 투옥되었다. 10년을 감옥에서 보내던 손양윤은 병이 심해져 잠깐 가석방되지만 밖으로 나온 지 불과 10여 일 만인 1940년 12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대한광복회 |
1913년 이래 경북 영주 풍기에서 활동해온 광복단(光復團0과 1915년 대구 앞산 안일암에서 창립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1915년 음력 7월 15일 달성공원에서 발전적으로 통합되어 만들어졌다.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 무장 항일 운동을 이끈 대표적 독립운동 단체로서 1920년 의열 투쟁의 밑바탕을 놓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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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윤은 그 이전인 1918년 1월에도 대구법원에서 10년 실형을 언도받고 8년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그는 1916년 이래 박상진, 채기중, 우재룡, 노백린, 김좌진, 신두현 등이 주축을 이룬 독립운동단체 대한광복회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던 중 1917년 일경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8년에 이르는 감옥 생활을 마친 그는 만주로 망명하여 신민부의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러던 중 다시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신현규, 이병묵 등과 함께 국내로 들어왔고, 활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재차 10년을 옥중에서 보냈다. 그리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손양윤 지사 생가터는 북구 서변동 1132 손양윤 독립지사의 생가터는 북구 망월동 23(서변동 1132)에 남아 있다. 터가 남아 있다는 것은 집이 멸실되었다는 말이다. 생가터 인근에 '서변동 선사유적 전시관(호국로57길 6 유니버시아드 레포츠센터 1층)', 임진왜란 의병장 이주(1556∼1604)의 서계서원(호국로51길 45-17)과 구회신(1564∼1634)의 표절사(동변로24길 22-37)로 대표되는 역사유적이 있고, 대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자연하천인 동화천도 서계서원과 표절사 사이를 흐르고 있지만, 손양윤 독립지사의 생가터 자체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생가는 물론 안내판이나 표지석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