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군자금 모금 맹활약 '죄'로 18년 감옥 생활

손양윤 독립지사의 생가터를 찾아

등록 2018.03.29 13:58수정 2018.03.29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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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을 한 '죄'로 18년이나 감옥 생활을 한 손양윤 독립지사 집터 일원의 풍경. 붉은 적벽돌 담과 그 너머로 보이는 2층 벽돌집 사이의 빈터와 물류창고 일대가 손양윤 지사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독립운동을 한 '죄'로 18년이나 감옥 생활을 한 손양윤 독립지사 집터 일원의 풍경. 붉은 적벽돌 담과 그 너머로 보이는 2층 벽돌집 사이의 빈터와 물류창고 일대가 손양윤 지사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정만진

국가기록원이 경성복심법원의 1929년 12월 2일 손양윤 독립운동가 관련 판결문을 번역해서 수록해둔 부분의 첫머리를 읽어본다.

이름: 손양윤(孫亮尹)
당시 나이: 50세
주소: 경상북도 달성군 성북면 사변동 1132번지(현재 대구시 북구 서변동 1132)
죄명: 강도, 강도 상인(傷人, 사람을 다치게 함)
주문: 징역 20년, 원심 미결 구류일수 중 250일을 본형 산입
판결 날짜: 1929년 12월 2일


신민부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를 주축으로 한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통합을 추진한 끝에 1925년 3월 한족연합회를 결성했다. 한족연합회에는 북만주 지역의 항일운동 단체들은 물론 국내 단체들도 참가했다. 한족연합회는 그 후 이름을 신민부로 바꾸었다.

판결문의 <사건 개요>는 '부자를 습격하여 자금을 모아 신민부(新民府)와 연락하여 조선 독립 운동을 하기로 하고 이병묵 등을 참가시켜 민가를 습격, 협박하여 금원(金員, 돈)을 강취(强取, 강제로 빼앗음)하였다.'이다. 판결문을 대략 현대문으로 바꾸어가면서 더 읽어본다.

부자들을 협박하여 독립군 군자금 마련

손양윤은 신현규(申鉉圭)와 함께 부자에게서 금품을 강탈하기로 공모했다. 1926년 봄 두 사람은 대구부(현재 대구시) 달성공원에서 만주의 신민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부자들에게서 금품을 빼앗기로 결의했다. 그 후 1927년 음력 12월까지 대구부 덕산정 277번지 신현규의 집과 기타 장소에서 이병묵(李丙黙), 손허(孫許), 윤창선(尹昌善) 등을 계획에 참가시켰다.

 손양윤 독립지사가 동지들과 함께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 만주의 독립군들에게 군자금으로 보내기로 결의했던 장소, 달성공원의 풍경이다. 사진 가운데 높은 지점에 보이는 누각은 관풍루이다. 관풍루(대구시 문화재자료 3호)는 본래 경상감영의 정문이었는데 친일파 대구군수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훼철할 때 이곳으로 옮겨졌다.
손양윤 독립지사가 동지들과 함께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 만주의 독립군들에게 군자금으로 보내기로 결의했던 장소, 달성공원의 풍경이다. 사진 가운데 높은 지점에 보이는 누각은 관풍루이다. 관풍루(대구시 문화재자료 3호)는 본래 경상감영의 정문이었는데 친일파 대구군수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훼철할 때 이곳으로 옮겨졌다.정만진

손양윤은 신현규와 공모하여 1926년 6월 13일 오후 10시 30분 각자 조선식 칼을 가지고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면 오평동 32번지 기전정일(幾田精一)의 집에 침입, 가져간 칼의 등으로 기전정일을 여러  차례 구타하여 왼쪽 팔 상박부에 길이 5푼, 넓이 약 2푼, 깊이 약 6푼 및 길이 약 3푼, 넓이 약 5리, 깊이 약 3리의 전치 약 1주를 요하는 2개의 상해를 입히고, 또 동인을 허리띠 삼끈으로, 동인의 처 춘지(春枝)를 여자용 허리끈으로 결박하고 돈을 내놓으라고 강요하여 돈 105원, 엽총 2정, 명주실 약 100문, 호사사 약 30문, 신모사 소건 약 7척, 비스킷 약 100문 등을 강탈하였다.

1926년 음력 5월 7일 밤에도 신현규와 공모하여 식도와 권총 모양의 물건을 휴대하고 칠곡군 왜관면 매원리 348번지 이이창(李以昌)의 집에 침입, 가져간 흉기로 이이창의 앞가슴을 구타하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여 228원 23전과 안경 1개 등 여러 가지를 강탈하였다.


같은 해 8월 30일경 밤에 또 신현규, 이병묵과 공모하여 재차 이이창의 집에 침입했다. 2명은 안뜰에서 망을 보고 1명은 이이창에게 흉기를 들이대며 돈을 내놓지 않으면 살해하겠다고 위협하여 40원을 강탈하였다.

 손양윤 지사 집터의 입구에 세워져 있는 담장과 지번 표시판
손양윤 지사 집터의 입구에 세워져 있는 담장과 지번 표시판정만진

1928년 1월 19일에는 신현규, 이병묵, 손허와 공모하여 오후 10시 30분경 곤봉, 총기 모양의 물건을 가지고 왜관면 매원리 340번지 이상기(李相琦)의 집에 가서 2명은 집 밖에서 망을 보고, 다른 2명은 집 안으로 침입하여 권총 모양의 물건을 이상기의 앞가슴에 들이대며 돈을 내놓지 않으면 사살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동인을 구타하여 그의 왼손 무지(拇指, 엄지손가락)와 차지(差指, 둘째손가락) 사이에 전치 2주를 요하는 길이 약 1촌, 넓이 약 2푼의 열상을 가하며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여 118원을 강탈했고, 이어서 동인의 아버지 이지연(李志淵)도 협박하여 30원 20전을 강탈하였다.


2월 29일 오후 9시경에는 신현규, 이병묵과 함께 식도, 곤봉 등을 가지고 왜관면 매원리 416번지 이수연(李秀延)의 집에 가서 2명은 대문 밖에서 망을 보고 1명은 집 안에 침입하여 이수연의 어머니 장장곡(張長谷)에게 위해를 가할 기세를 보이며 협박을 가하여 돈을 내놓으라고 강요하였으나 이수연이 돈이 없어서 강취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3월 25일 오후 11시경에는 신현규, 이병묵, 손허와 공모하여 식도와 총기 모양의 물건들을 가지고 칠곡군 약수면 관호동 69번지 장일환(張日煥)에게 살해하겠다고 협박하여 370원 20전을 강탈하였다.

 손양윤 독립지사의 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물류창고가 들어서 있다.
손양윤 독립지사의 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물류창고가 들어서 있다.정만진

4월 15일 오후 10시경에는 신현규, 이병묵, 손허와 함께 각자 흉기를 가지고 경산군 남산면 경동 650번지 김두남(金斗南)의 집에 가서 2명은 문밖에서 망을 보고 다른 2명은 집에 침입하여 끈으로 김두남을 결박한 후 마침 집에 있던 공기총으로 김두남을 구타하며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여 800원을 강탈했다.

일제에 체포될 당시 손양윤 지사는 50세였다

손양윤(1878∼1940)은 일제 경찰에 체포된 1929년 4월 당시 50세의 장년이었다. 그는 징역 20년을 언도받고 투옥되었다. 10년을 감옥에서 보내던 손양윤은 병이 심해져 잠깐 가석방되지만 밖으로 나온 지 불과 10여 일 만인 1940년 12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대한광복회


1913년 이래 경북 영주 풍기에서 활동해온 광복단(光復團0과 1915년 대구 앞산 안일암에서 창립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1915년 음력 7월 15일 달성공원에서 발전적으로 통합되어 만들어졌다.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 무장 항일 운동을 이끈 대표적 독립운동 단체로서 1920년 의열 투쟁의 밑바탕을 놓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손양윤은 그 이전인 1918년 1월에도 대구법원에서 10년 실형을 언도받고 8년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그는 1916년 이래 박상진, 채기중, 우재룡, 노백린, 김좌진, 신두현 등이 주축을 이룬 독립운동단체 대한광복회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던 중 1917년 일경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8년에 이르는 감옥 생활을 마친 그는 만주로 망명하여 신민부의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러던 중 다시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신현규, 이병묵 등과 함께 국내로 들어왔고, 활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재차 10년을 옥중에서 보냈다. 그리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손양윤 지사 생가터는 북구 서변동 1132

손양윤 독립지사의 생가터는 북구 망월동 23(서변동 1132)에 남아 있다. 터가 남아 있다는 것은 집이 멸실되었다는 말이다. 생가터 인근에 '서변동 선사유적 전시관(호국로57길 6 유니버시아드 레포츠센터 1층)', 임진왜란 의병장 이주(1556∼1604)의 서계서원(호국로51길 45-17)과 구회신(1564∼1634)의 표절사(동변로24길 22-37)로 대표되는 역사유적이 있고, 대구에 남아 있는 유일한 자연하천인 동화천도 서계서원과 표절사 사이를 흐르고 있지만, 손양윤 독립지사의 생가터 자체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생가는 물론 안내판이나 표지석도 없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보다 200년 전에 만들어진 초조 대장경은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몽고군의 침략 때 방화로 거의 소실되었다. 절도 이때 불에 타서 전소되었고, 지금 볼 수 있는 절집들은 모두 현대에 건축한 것들이다. 사진은 고려 시대 부인사 절집들이 남긴 건축 석재들이다. 부인사 터는 대구시 기념물 3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인사 터에는 대구시 유형문화재  17호인 서탑 등이 남아 있다. 동탑은 부서진 것을 대략 재건립해 놓은 탓에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보다 200년 전에 만들어진 초조 대장경은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몽고군의 침략 때 방화로 거의 소실되었다. 절도 이때 불에 타서 전소되었고, 지금 볼 수 있는 절집들은 모두 현대에 건축한 것들이다. 사진은 고려 시대 부인사 절집들이 남긴 건축 석재들이다. 부인사 터는 대구시 기념물 3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인사 터에는 대구시 유형문화재 17호인 서탑 등이 남아 있다. 동탑은 부서진 것을 대략 재건립해 놓은 탓에 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했다.정만진

그렇다고 해서 손양윤 지사의 생가터를 찾는 일에 아무런 의미도 없고, 남다른 보람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대구의 역사유적 가운데 그런 사례의 가장 단적인 곳은 부인사이다. 부인사는 현재 해인사에 남아 있는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재조 대장경)보다 200년 전에 제작된 6,000여 권의 초조 대장경이 보관되어 있었던 곳이다. 하지만 1232년(고려 고종 19) 몽고군의 침입 때 불살라 없어져버렸다.  

유적이 없다고 역사적 의미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인사를 찾으면 우리는 나라의 힘과 문화유산 보전의 중요성에 대해 저절로 되짚어보게 된다. 손양윤 독립지사 생가터에서도 우리는 역시 나라의 힘과 역사유적 보전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스레 생각해보게 된다. 타인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모습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의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에 담긴 참뜻도 진지하게 헤아려보게 된다. 물론 그보다는 손양윤 지사를 기리는 마음이 저절로 샘 솟아나게 해줄 수 있는 반듯한 조형물이나 표지가 세워져 있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이 훨씬 더 강렬하기는 하지만.
#손양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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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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