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스틸컷
소니픽처스코리아
나는 오랫동안 첫사랑은 없다고 생각해왔다. 연애도 이미 여러 번 해본 마당에 딱히 첫사랑이라고 떠올릴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늘 의아했다. 나는 서른이 넘어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십여 년 전 어느 영화제에서 퀴어 영화들을 보는 동안 기시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들의 연애담이 이해되는 한편 뭔가 불편하기도 했다. '어떤 불편함'인지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후 며칠 동안 중학교 때 반 친구가 내게 보냈던 편지가 내내 궁금했다. '그 편지를 내가 어디다 두었지?' 결국 며칠 후 엄마네 집 장롱 안에서 누가 볼 새라 꽁꽁 싸매 둔 편지 뭉치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건 중학교 때 동성 친구가 보낸 편지였다.
그 애와 나는 친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 애가 내게 좋아한다는 말과 함께 엽서를 보냈다. 이것을 시작으로 어쩌다보니 우리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쭉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떡볶이 한 번 같이 먹은 적 없는 우리가 왜 이렇게 열심히 편지를 주고받고 있는지, 고등학생의 나는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아주 강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고, 편지는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결과일 뿐이었으니까. 그 감정이 약해진 순간 편지도 자연스럽게 끊겼다.
오랜만에 편지를 찬찬히 읽는 동안 나는 알 것 같았다. 왜 내게 첫사랑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 애가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말이다. 동성 간의 감정은 사랑이 아닌 우정이라는 생각, 사춘기 시절엔 잠시 그럴 수 있다는 어른들의 가벼운 시선이 내 마음에도 그대로 복제되었던 모양이다.
세상에 '그런' 사랑이 존재하는 줄 알았다면, 나는 내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 그건 분명 사랑이었고, 그 애는 내 첫사랑이었다. 그 친구와 나눈 것이 무엇인지 내 마음 깊은 곳에선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의식 밖으로 꺼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나에게 첫사랑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연히 이성애자인 줄 알고 살아왔던 난 머리가 아팠다. '정말 사랑 맞아?' 의심도 했다. 그렇다고 여느 친구들에게 느꼈던 것과는 완전히 결이 달랐던 그 감정을 한 때 지나가는 치기어린 것으로 치부하긴 싫었다. 그렇다면 나는 양성애자일까?
어느 날 내가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된다면긴 생각 끝에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이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확실치 않지만, 슬프게도 나는 오랜 시간 '이성애 중심주의'에 강력하게 중독 되어왔고, 그로부터 빠져나오긴 쉽지 않을 거라고.
깨달음(?)을 얻은 지 십여 년이 지났다. 그 사이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 결혼도 했다. 결혼이 사랑의 종말을 뜻하는 건 아닐 것이다. 만약, 미래의 어느 날 내가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된다면, 첫사랑과 같은 순간이 다시 한 번 찾아오기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며 생각했다.
물론 이 판타지를 행동으로 옮길 가능성은 아주 낮겠지만, 이런 은밀한 상상만으로도 며칠 기분이 설렜다. 이 영화의 힘은 사랑의 감정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찬양하고 또 그 뒤의 씁쓸한 맛까지 모두 살려낸 데 있다. 영화를 본 뒤 떠오르는 낯선 생각이나 감정이 있다면 영화가 준 선물이라 생각하며 그 순간을 기쁘게 즐기면 된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 젊은 백인 남성들의 사랑이 영화를 통해 찬란하게 우리 앞에 나온 것처럼, 여성간의 사랑도, 노인이나 흑인 간의 사랑도, 그랬으면 좋겠다. 오래 전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들이 지금 현실이 되었듯, 영화 속 엘리오와 올리오의 사랑이 현실에서도 평범하게 받아들여지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환한 햇살 속에 모든 사랑이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이 찾아오리니, 마음껏 사랑하라! 이 영화가 내게 준 메시지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
공유하기
중학교 때 동성친구가 보낸 편지, 그건 첫사랑이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