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 8. 15. 대구,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내고 임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던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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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7일 새벽... 대통령, 서울을 탈출하다
1950년 6월 25일 이른 새벽,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날 오전 비원에서 낚시를 즐기다가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전방 전투상황 보고를 받았다. 신성모의 첫 보고는 "크게 걱정할 것 없다"였다고 한다.
6월 26일 새벽 이승만은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전쟁 발발 사실을 알리고 직접 통화를 요청했다. 부관이 맥아더 원수를 깨울 수 없다고 하자 "당신네들이 빨리 도와주지 않으면 여기에 있는 미국 시민들이 한 사람씩 죽어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는 독설을 퍼부어 맥아더를 깨웠다.
6월 26일 경무대(현 청와대) 상공에는 벌써 북한 공군기가 나타나 이승만은 일제시대에 파놓았던 경무대 구내 방공호로 몸을 숨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오후 3~4시께 이승만은 기밀서류를 챙긴 뒤 갑자기 서울 탈출을 위한 특별열차를 대기시키도록 명령했다. 그날 심야에 국무회의가 열렸으나 이승만은 참석하지 않았다.
6월 27일 새벽, 북진을 장담하던 신성모 국방장관이 피신을 권유하자 이승만은 새벽 3시 30분에 남행을 결정했다. 이승만의 피란 행렬에는 부인 프란체스카,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홍, 비서 황규면 그리고 경호 경관 1명 등 6명이었다. 이승만 일행을 태운 남행 열차는 새벽 4시 무렵 서울역을 출발했다.
그날 오전 11시 40분, 열차가 대구에 도착하자 이승만은 열차를 정지시키고 서울로부터 정보를 취합했다. 그는 그제야 너무 서둘러 서울을 떠났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이승만은 열차를 다시 돌려 낮 12시 30분에 대구에서 북상해 오후 4시 30분 무렵에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에는 서울을 탈출한 3부 요인과 고위 관료들이 이미 상당수 도착해 있었다.
대전 도착 후 이승만은 현지에서 녹음 방송을 했다. 그 방송을 통해 자신은 마치 서울에 체류 중인 것처럼 위장해, 서울시민을 비롯한 전 국민들에게 안심하라고 연설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 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나 리승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