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내용 중책 내용 중에서 일부를 사진으로 찍은 것입니다.
이동규
인간이 되고 싶어 마늘과 쑥을 먹으며 100일을 시간을 버텨내던 단군 신화의 곰처럼, 나도 일주일 내외의 기간 동안 이 책을 자양분 삼아 '다시 사람 되기' 연습을 해나갔다. 그저 기분 탓일까.
아니면 정말 효능이 있었던 걸까. 뭐가 진짜인지는 몰라도 이 책의 끝을 향해가는 동안 난 -조금이나마- 점점 10여 년의 진짜 내가 다시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챕터 12개, 299페이지를 달리는 동안, 이 책은 독자에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여러 '무늬'들을 문제제기하고 나름의 탐색을 하도록 도와준다.
가난과 풍요에서부터 사무침과 떨쳐냄, 비참과 영광, ...... , 속(俗)과 성(聖), 사랑과 사랑, ...... , 미(美)의 추구와 진(眞)의 존재, 선(善)과 악(惡), ...... , 소통과 명상, 활(活)과 할(喝∇)까지, 수를 헤아릴 수 없고 종류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얘깃거리들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무늬를 탐구, 즉 셀프 인문학(人紋學)을 진지하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책 속의 시들은 독자에게 촉매이고 기폭제일 뿐이다. 어두워서 몰랐던 우리의 미주알고주알을 밝혀주는 기습 조명탄이다.
사소한 걸 위대하게비록 책을 통한 간접적인 해후였지만 15년 만에 다시 만난 교수님은 그렇잖아도 훌륭했던 강의력이 한층 더 강력해지셨다. 본래도 종횡무진 동분서주하며 뻔하고 지루한 주제를 재미나게 변주시키고 확장하는 데 일가견이 있으셨음에도, 고속화된 네트워크 시대에 걸맞게 교수님의 능력 역시 한층 더 넓고 다양한 차원으로 승화된 듯했다.
독자에게 소개하려는 시의 소재나 주제의식 차원에서 티끌만한 연계성이 있고, 그 연계성이 유의미한 해석을 담보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영화든, 클래식이든, 대중가요든, 회화든, 소설이든, 심지어 역사든 과학이든 철학이든, 한술 더 해 일상의 '욕지거리'든 간에 거침없고 막힘없이 강의의 도구 내용으로 활용됐다(문득 1학년 수업 때 운(韻)을 설명하기 위해 당시 '엽기 가수'로 유명해진 싸이의 '새'를 언급하셨던 일이 생각난다. 당신이 직접 랩까지 하셨다면 아마도 그때 그 수업이 더 극적이었을 텐데).
문화의 각 분파에서, 학문의 각 분파, 나아가 생활 풍속 차원의 요소들까지, 이 땅위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인간 '존재'의 이모저모를 밝히는 데 쓰인 셈이다.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평상시에 별 것 아니라 생각했던 우리 인간의 소소한 감정 하나하나들이 이렇게나 많은 의미들을 파생시킬 수 있는 것이었나 새삼 놀라게 된다.
어차피 도려낼 수 없는 거라면 품고 가라책은 챕터별로 다양한 주제의식을 다루는 듯 보이지만, 그 뿌리에 뿌리를 추론하며 읽어 가면 근원점이라 할 만한 쟁점 하나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인간이 엄연한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소외감, 즉 '존재론적 소외감'이다.
곁에 누군가가 아무리 많아도, 가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제 아무리 전도유망한 사람도, 살다보면 누구나 - 불현듯, 막 - 본인이 무엇인가로부터 유리(遊離)되었다는 걸 느낄 때가 반드시 한번 이상 있다(라캉은 이걸 거울 단계 이론으로 설명하겠지만). 저자는 이를 섣불리 해부하려하지도, 해결하려 들지도 않는다.
다만 동서고금의 숱한 타자들을 불러오고 그들의 얘기를 곁들여주며 "너만 그런 건 아냐"라며 위로를 해줄 뿐이다. 그리고 그 끝에 살짝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때" 하고 제언을 해줄 따름이다. 그렇게 독자 한 명 한 명에게 본인만의 소외감과 조금 친해져보길 권유한다.
친해지면 덜 무섭고, 더욱 친해지면 내 것처럼 여길 수 있다. 어차피 도려낼 수 없는 거라면 품고 가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소외감이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심상이라면 도려내지 말고 품고 가는 게 어떠하냐는 식이다.
시시비비를 초월한 시비 걸기물론 책 속에 밝히 정재찬 교수님의 견해를 추종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동의하는 바는 동의하는 바대로, 공감가지 않는 바는 그것대로, 조금은 까탈스럽게 선별해도 좋다. 아니 오히려 정 교수님은 독자가 그렇게 까다롭게 굴기를 더 바랄지도 모른다.
저자 역시 마지막 챕터 첫 장에서 "뻔한 시에 시비"를 걸어달라고 독자들에게 부탁한다. 시 해석과 시 감상에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시시비비를 초월한 딴죽 걸기다. 교수란 이유로, 작가란 이유로, 이 땅위의 수많은 독자들은 그렇게 책 저자들의 권위에 짓눌려 자신의 취향과 소신을 '잊고 지낸'다. 권위에 의존하는 독서는 뻔하다. 권위에 굴종하는 독서도 뻔하다.
16년 전을 돌이켜보니 원래 교수님 강의 스타일도 그랬다. 이색적이었고 도발적이었다. 요즘 시쳇말로 아재 나이 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아재스럽지 않으셨고, 꼰대스러운 면모는 1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당신이 강의하시던 중 가끔씩 우리에게 질문도 하셨는데, 우리가 당최 아는 게 적어서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차마 어린 대학생들에게 대놓고 질책하시질 못해 '벽과의 대화'를 시도하셨을까. 그만큼 의중을 밝히는 데 방식이 기발했던 분이었다.
이 책 안에서도 교수님의 뜻이 전후좌우 사방팔방 파격의 옷을 입고 넘실댄다. 우리는 그 춤사위에 한껏 유쾌하게 장단만 맞춰도 책을 읽은 보람은 차고도 남는다. 그러나 기왕 장단을 맞춰본 김에 그 기세를 타서 한번 나만의 리듬까지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누가 알까.
시를 잊고 지내느라 덩달아 잊었던 삶의 의욕이 되살아날지. 또, 그렇게 "새로운 리듬 속에 헛 믿음이 바"뀌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해봐야 안다. GD의 가사에 나온 말따나 "동네 양아치처럼"까지는 아니어도, 일단 한번 해보자. 내 삶의 괴로움에 "괜히 시비 걸어"!
시를 잊은 그대에게 -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
정재찬 지음,
휴머니스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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