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노조 삼성서비스지회 곽형수 수석 부지회장.
이희훈
"저 최종범, 그동안 삼성서비스 다니며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 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 전태일님처럼 그렇진 못해도 전 선택했어요. 부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질 못하겠으며 조합원들의 힘든 모습도 보지 못하겠기에 절 바칩니다. 저 하나로 인해 지회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저의 시신을 찾게 되면 우리 지회가 승리할 때까지 안치해 주십시오."
두 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최종범은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에서 일했다. 신혼이었고, 막 첫돌을 앞둔 딸이 있었다. 그가 노조활동을 하자 회사는 표적감사를 벌였다. 일감을 줄였다. 센터 사장은 폭언을 일삼았다. 마음이 여린 그는 모든 것을 속으로 삭였다. 그리고 전태일 열사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지 43년이나 지난 2013년, 그는 노조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의 33세였다.
염호석은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분회장이었다. 항상 살갑고 활기찬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남을 더 돌보는 사람이었다. 그가 동료들과 함께 노조를 설립한 지 1년 가까이 지났지만, 사 측의 압박은 더욱 강해졌다. 노조를 막기 위해 조합원이 많은 센터 문을 닫아버리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는 지난 2014년 "저를 받칩니다. 지회의 승리를 기원합니다"라며 자신의 시신을 노조에 맡겼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삼성전자서비스는 최근 검찰이 벌이는 삼성의 노조파괴 문건 관련 수사에 핵심적인 사업장이다. 삼성전자서비스의 문제는 지난 2013년 5월 <오마이뉴스>의 '삼성A/S의 눈물'이라는 기획을 통해 처음 폭로됐다. 서비스 기사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회사의 부당한 처우, 그리고 삼성전자서비스의 불법파견 의혹이 제기됐다. 500여 명의 노동자들은 삼성이 실제 사용자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 나섰다. 그리고 이는 기획보도 이후 두 달 만에 노조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삼성에서는 여러 차례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노조 설립시도가 있었다. 사측은 이를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결국, 노조 설립으로 이어지는 사례는 찾기 어려웠다. 그때까지 삼성에버랜드 노동자 4명이 만든 삼성지회가 유일하다시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삼성전자서비스노조는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기세로 설립됐다. 삼성은 자신들이 실사용자가 아니라며 노조의 지휘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삼성전자서비스는 삼성과 노조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전선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곽형수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수석부지회장은 그 전선 한가운데 있었다. 그는 설립 당시부터 노조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지난 9일 검찰의 신속하고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기 위해 대검찰청을 찾은 그를 만났다. 곽 수석부지회장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놓여있는 큰 돌 두 가지를 털어 놨다. 앞서 이야기 한 최종범, 염호석의 이야기다. 특히 그는 경찰의 '염호석 시신탈취 의혹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표적감사, 지역 쪼개기로 시작된 노조 탄압"곽 수석부지회장은 인터뷰에서 "이번 검찰 수사에서 반드시 (시신탈취 의혹에) 진상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검찰이 확보했다는 문건 안에 있을 것"이라며 "열사는 우리에게 자신을 맡겼는데 그걸 지키지 못했다. 장례나 제대로 치렀는지, 그 시신이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화장했다면 그 '분'이라도, 아니라면 열사의 시신이라도 돌려주실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곽 수석부지회장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 2013년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설립됐다. <오마이뉴스>가 처음 위장도급, 열악한 근로조건 문제를 제기하고 불과 두 달 만에 수백 명의 조합원이 모였다. 노조하기 어렵다는 삼성에서 아주 드문 사례였다. "업무 특성상 각 센터가 떨어져 있고, 일하는 구역도 다 정해져 있기 때문에 구성원들끼리 서로 잘 알 수가 없었다. 영등포와 양천 센터가 가깝지만 서로 모른다. 그래도 그 안에서 꾸준히 노조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노사협의회 활동했던 분들을 중심으로 한 흐름이 있었다. 또 기술 교육을 위해 전국 센터에서 '기술 리더'를 뽑아 집체교육을 하면서 각 센터별로 교류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가 또 하나의 흐름이 됐다.
<오마이뉴스>가 우리 문제를 처음 보도하고 국회에서 나서면서 노조결성에 불이 붙었다. 시민사회와 금속노조가 전국 센터 앞에 1인 시위를 조직했다. 그걸 통해 노조가입 운동을 벌였다. 그때부터 사측의 엄청난 압박이 있었다. '삼성에서 노조가 가능할 거 같은가', '삼성에서만 잘리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어디에도 발 못 붙인다' 같은 소리를 들었다. 이런 협박을 계속 듣고 있으니 위축만 되고 노조도 못 세울 수 있겠다는 불안이 있었다. 그래서 급하게 설립을 준비했다. 그랬음에도 7월 설립총회에 수백 명이 모였다. 이후 9월까지 1500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 노조가 설립된 이후에도 삼성은 어떻게 나왔나?"먼저 표적감사가 시작됐다. 보통 성수기가 지나면 감사가 나온다. 물량이 많을 때 허위신고를 했거나 잘못 처리한 게 있는지 한 번 살피는 과정이다. 이미 정상적인 감사가 끝났는데 또 감사를 했다. 조합원이 많은 센터에 집중됐다. 3~4년 전 문서까지 다 뒤졌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괴롭혔다. 조합을 탈퇴하면 표적감사를 면제해주겠다는 식으로 노조를 약화시켰다."
- 그 당시 '지역 쪼개기'도 이뤄졌다고 들었다. 어떤 방식이었나?"각 센터별로 담당하는 구역이 있다. 100% 구역이 있다면 갑자기 50%를 다른 센터로 보내는 거다. 어제까지는 내가 담당했던 구역인데, 오늘은 다른 센터가 담당하게 됐다. 주로 조합원이 많은 센터의 구역을 비조합원들만 있는 센터로 넘기거나, 원청(삼성전자서비스 직고용) 직원들이 가져갔다. 구역이 줄어들면 일감도 준다. 서비스 기사들은 건당 수수료를 받아야 하는데 급속도로 줄어들게 됐다. 그때 30~50만 원짜리 월급명세서가 여러 장 나왔다. 평소 급여가 많아 저축하면서 살아온 것도 아니고, 당장 생활이 안됐다. 결국 여러 사람들이 노조를 탈퇴하게 됐다. 그렇다고 그 분들을 원망하거나 그러지 않는다. "
- 센터가 담당하는 구역은 일종의 원청과 협력업체의 계약인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변경할 수 있었나?"서류상으로는 문제가 없다. 협력사(각 센터) 사장이 갑자기 자기 구역 반납요청을 한다. 주로 인력부족을 이유로 든다. 그러면 그걸 원청이 받아서 다른 센터와 계약하는 식으로 구역을 뺏어가는 거다. 이게 정말 말이 안 되는 이유는 협력사 사장들도 서비스 건수를 기준으로 이익을 가져간다. 아무 문제 없는 구역을 원청에 반납한다는 건 자기 이익을 버리겠다는 얘기다. 당장 사장들도 타격을 입는 구조인데, 결코 스스로 반납할 이유가 없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나. 결국, 삼성이 실질적인 사용자라고 봐야 하지 않겠나."
"최종범, 그 모멸감을 혼자 버티다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