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졸업한 제자가 찾아왔다. 올해 나이가 스물다섯이라고 하니, 졸업한 지 5~6년은 된 듯하다. 만나 뵙고 싶어 일부러 학교를 찾았다고 둘러댔지만, 뭔가 부탁할 게 있다는 눈치다. 아닌 게 아니라, 서로의 안부를 채 묻기도 전에 한국사 교과서 여분이 있으면 한 권 달라고 본론부터 말했다.
그가 뜬금없이 한국사 교과서를 찾는 이유가 있었다. 올해 다시 수능을 준비하고 있단다. 제자들 중엔 대학에 입학한 뒤 '반수'를 해서 다시 수능을 치르는 경우가 드물지 않아 그다지 놀랍진 않았지만, 그러기엔 그의 나이가 너무 많다. 참고로 '반수'란 상위권 대학에 진학할 목적으로 한 학기를 다닌 뒤 휴학을 해서 수능을 다시 준비하는 경우를 일컫는 은어다.
듣고 보니, 그의 이십 대 초반의 삶은 여느 또래와는 많이 달랐다. 막상 대학에 진학했으나 자신이 생각했던 대학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어서 한 해 동안 방황하다 끝내 그만뒀다고 한다.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는 일상은 고등학교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고, 단지 달라진 건 술 먹고 담배 피울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뿐이었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신 등급을 올리려 발버둥 쳤다면, 대학에선 학점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고등학교 공부의 종착역이 수능이라면, 대학에서의 공부는 실상 취업이 목표이니, 이 또한 똑같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요즘 또래들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기꺼이 야간자율학습을 받아들이듯, 대학에 가면 신입생 때부터 취업 준비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고 한다.
취업에 보탬이 되지 않는 강좌는 폐강되기 일쑤고, 취업 설명회가 열릴라치면 휴강이 속출하는 것도 고등학교와 닮았다고 했다. 수능에 출제되지 않거나 내신에 반영되지 않는 교과는 교육과정에 편성조차 되지 않고, 고3의 경우에는 각 대학의 입시 설명회가 마치 정규수업처럼 이루어지고 있지 않느냐는 거다. 그에게 짧았던 대학 생활 1년은, 고등학교가 입시 학원이듯 대학이 취업 학원으로 전락했다는 걸 새삼 깨달은 시간이었단다.
도피하듯 군에 입대했는데, 남들 같으면 병역 면제받기 위해 안달하는 군 생활이 외려 즐거웠다고 한다. 이따금 군인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생각에, 장기복무를 하거나 전역한 뒤 사관학교 진학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단다. 사생활이 거의 없는 엄격한 규율의 단체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적성과 진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며 나름 행복했단다.
제대한 뒤 5개월 남짓 유럽으로 홀로 배낭여행을 다녀왔다고도 했다.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는 스코틀랜드에서 시작해 프랑스와 독일, 스페인 등 배회하듯 유럽을 두루 여행했다고 한다. 경비는 군 생활 동안 모은 월급만으론 턱없이 부족해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학비라면 몰라도 여행 경비는 엄연히 개인 간의 채무라며, 반드시 갚을 것이라고 짐짓 강조했다.
그의 여행담은 온통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어디를 다녀왔는지는 오직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특히 여러 나라에서 자기처럼 여행 온 또래들을 여럿 만났다고 하는데,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사나흘 간 동행한 적도 있단다. 비용을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서 유스호스텔을 수소문하고, 장거리 이동을 할 때 매번 야간열차를 이용한 덕이라고 했다.
나이는 20대로 얼추 비슷했지만, 대학생인 경우가 드물어 순간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요리사부터 간호사, 목수, 건축가, 컴퓨터 프로그래머, 가수 등 갖가지 직업을 가진 또래의 젊은이들이 무척 어색했다는 것이다. 으레 20대라면 우리나라에선 대학생이 태반이지만, 유럽에서는 대학생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 자체가 문화적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우리 같으면 다짜고짜 학번부터 물었을 텐데, 직업이 천차만별이다 보니 대학에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비록 스마트폰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어설픈 대화였지만,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만 서로 대화가 오갈 뿐이었단다. 영어가 짧은 탓도 있지만, 여태껏 생각해본 적이 없던 주제라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 만족해야 했다며 아쉬워했다.
명색이 '대학 물'을 먹어본 몇 안 되는 사람이었지만, '고졸'인 그들이 솔직히 부러웠단다. 돈벌이는 변변치 않아도 지금 아니면 경험하기 힘든 일을 즐겁게 하고 있다는 그들이 처음엔 철부지 같았다고 했다. 목수 일을 한다는 한 영국 청년은 좀 더 깊이 있는 공부를 위해서 대학 진학을 고려중인데, 서른 즈음 늦깎이 대학생이 될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단다.
대학 진학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여기는 그들의 삶을 통해, 대학입시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의 맹목적인 학창시절을 떠올려보게 됐다고 한다. '대학 졸업장이 없으면 사람대접 못 받는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그에게 그들의 대화가 너무나 낯설었던 것이다. 오로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불문율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깨우쳐준 셈이다.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일상은 변한 게 없지만, 삶을 마주하는 마음가짐이 훨씬 여유로워졌다고 그는 말했다. 이태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직업을 물으면 '알바생'이라고 대답하며 은근 주눅이 들었는데, 요즘엔 당당해졌다고 한다. 비록 이런저런 알바를 하면서, 남이 보면 근근이 살아가고 있지만, 적어도 대학에 다니고 있는 또래 친구들이 부럽진 않단다.
이따금 친구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여전히 미래에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갈지 고민 중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들 중 몇몇은 그가 대학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앞으로의 인생을 망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충고 아닌 충고를 해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외려 그가 그들 앞에서 '너무 일찍 영문도 모른 채 대학에 간 것'이라며 따끔한 일침을 날린다며 웃어 보였다.
그는 취업 학원으로 전락한 대학이 싫어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으면서도, 대학에 우선 책임을 돌리진 않았다. 아무런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맹목적으로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들과, 등 떠미는 교사와 부모 탓이 더 크다고 말했다. 고등학교에선 오로지 대학입시를 위한 기술만 가르치고, 부모들 역시 그것이 고등학교의 존재 이유라고 여기니 학생들의 눈이 멀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입만 열면 등록금은 천정부지인데 교육의 질은 낮다며 마구 대학을 욕하면서도, 부모들은 그런 대학에 당신의 자녀를 보내지 못해 안달인 현실을 그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적폐'로 규정했다. 애초 대학 졸업장이 목표일 뿐,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니 대학 역시 게을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고등학교 때 공부와 대학에서의 공부에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건 그래서라고 잘라 말했다.
방황하며 20대 초반의 황금기를 보낸 그는 비로소 마케팅 관련 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살아가는 게 공부였고, 어느 곳이든 다 가르침을 주는 학교였다며, 군 생활도, 알바도, 심지어 자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도 자신을 성장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선선히 말했다. 학교가 교육을 독점하는 시대도 아니고, 대학입시가 없었다면 학교는 진작 존재감을 상실했을 거라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곧, 5년 남짓의 방황이 그를 배움의 길로 이끈 것이다. 부끄러운 고백이라면서, 스스로 공부에 대한 욕심이 생긴 건 태어나 처음이라고 말했다. 만약 그때 대학을 그만두지 않고 남들 다 하는 대로 따라갔다면, 아마도 자발적인 공부는 여전히 남의 나라 이야기였을 거라며 자신의 선택에 대해 짐짓 대견스러워했다.
여학생이라면 졸업하고도 남을 나이에 대학 새내기 생활을 한다는 게 여간 힘들지 않을 거라고 응원하듯 말했더니, 답변 대신 엉뚱한 질문이 돌아왔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30년 전 내가 고등학교 다닐 적에도 궁금했던 것이기도 하다. 만약 그때 같은 질문을 했다면, 대답은커녕 그런 쓸데없는 생각 할 시간에 영어 단어라도 하나 더 외우라는 꾸지람을 듣지 않았을까.
"대학 진학에 연령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의무교육인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는 그렇다 쳐도, 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예외 없이 곧장 대학엘 가도록 하는 걸까요? 굳이 대학에 가더라도 바로 진학하지 않고 학교 밖 색다른 경험도 하면서 삶을 준비할 수도 있잖아요. 어른들은 하나같이 '배움에는 다 때가 있다'고들 하는데, 그게 그런 뜻은 아니잖아요."
정시니 수시니, 수능이니 학종이니 하며 대학입시 내용과 방식을 두고 온 사회가 목청을 돋우고 있는 이때, 20대 초반을 방황하며 보낸 그의 삶이 마치 '정답'처럼 여겨졌다. 정작 중요한 건 입시가 아니라 대학 진학을 고정 상수로 보는 인식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그의 주장에 무릎을 쳤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 사회에 반드시 대학 공부를 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며, 또 공부가 좋아서 대학에 진학하는 고등학생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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