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마저 비장했던 그 시절 그 비장함을 무장해제 시킨 곡은 19살 여학생이 부른 심수봉의 '그대와 탱고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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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학교에서 스타가 되어있었다. 민중가요나 이문세 노래에 내 노래가 섞여 점심 시간에 흘러나왔다. 같은 과 친구들은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떠는데 나는 '가수는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아니 왜 내가 부를 때 들리는 목소리랑 녹음된 목소리는 이렇게 다르지?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가는데 누군가 나를 찾아왔다. 법학과 다닌다는 그는 내 공연을 봤다며 커피 한잔 하고 싶단다. 대학생이 되었다고 갑자기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닌데 어른스럽게 행동하느라 진땀이 났다.
그렇게 찾아온 그는 이후 매일 찾아왔다. "이 여자가 내 여자다"라는 대자보가 교문 앞에 일주일에 두 번은 붙었고 만나주지 않자 집 앞에서, 학교에서 자해소동까지 벌이는 게 다반사였다. 달콤꽁냥 샤방샤방한 멜로를 꿈꿨던 나는 이후 졸업할 때까지 추격액션공포스릴러물을 찍었다. 가요제는커녕 생존을 걱정해야 했으니, 꿈은 물 건너갔다.
마돈나의 '라이크 어 버진', 충격받은 병원장졸업 후 친구와 서울로 올라왔다. 친구는 수술실에서, 나는 응급실에서 일했다. '23금 격정멜로'를 찍어보겠다는 꿈은 고된 노동 앞에서 또다시 좌절되었다. 쉬어도 몽롱한 3교대 근무와 해도해도 쌓이는 일. 찢어진 환자 꿰매고 나면 약물중독환자. 그를 위세척 하고 나면 교통사고환자. 아무리 뛰어다녀도 느리다. 몸이 여기저기 부딪혀 멍드는 건 예삿일.
메디컬드라마에 나오는 러브라인은 다 헛소리다. 우리는 매일 '닥터 잡', '널스 잡'을 나눠서 '침범 했네 안 했네' 따위로 얼굴을 붉히고, 서로 만만해 보이지 않기 위해 웃겨도 화를 냈다. 경력이 짧은 간호사들은 명절이나 연말 회식 때 일을 해야 했으므로 4년이 지난 후에 나는 처음으로 연말 단체회식에 갔다.
유흥주점을 통째로 빌려 근무자들을 뺀 병원장 이하 직원들이 모였다. 부서별로 테이블에 둥그렇게 앉았다. 식전 행사가 끝나고 장기자랑을 했다. 1등한 팀은 상금 30만 원. 테이블마다 누가 대표로 나갈지 정하느라 웅성거렸다.
몇몇 팀들은 무대를 중심으로 삥 둘러서서 합창을 했다. 팀을 병풍처럼 세우고 혼자서 돌고래 초음파 같은 고음을 질러대는 선수도 있다. 나는 '닥치고 솔로'다. 평소에 밝고 상냥하긴 했지만 술도 못 마시고 내 끼를 보여준 적이 없어 황당해하는 응급실 선배님들께 '저 돈을 따다드리겠노라' 약속했다.
발목에 무리가 갈 수 있는 하이힐을 벗고 묶었던 머릴 풀었다. 밴드 마스터에게 내가 부를 곡을 알려준 뒤 무대 중앙에 선 나는 음악이 나오기도 전에 정체 모를 웨이브를 시작했다. 조명은 나를 취하게 하고 성실함은 타인을 기쁘게 한다. 박수를 쳐야 할지 웃어야 할지 헷갈린 순수한 영혼들이 허공을 떠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