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 표지군주론 표지
까치 출판사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인데 교과서에서 언급된 고전을 읽을 여유는 없고, 교과서에 언급된 몇 줄의 언급으로 그 고전에 대한 평가와 인상으로 언제까지나 간직하는 경우가 많아. 이런 우리나라 교육의 최대 피해자 중 하나가 <군주론>이란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빠가 고등학생 때 교과서에서는 마키아벨리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했어.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덕분에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키아벨리를 막연하게 권모술수의 대가라든가 군주에 편에서 약자를 핍박하고 자신의 출세를 노린 사람이라고 생각해. 정말 '군주론'은 권모술수에만 능하고 포악한 군주를 대변하는지 한번 살펴보자꾸나.
군주론은 워낙 다양한 해석이 분분한데 그중 유명한 것이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제기한 주장이야. 루소의 주장으로는 마키아벨리는 군주를 가르치는 척하지만 사실은 일반 국민들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는 거야.
군주론은 애초에 상류계층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라틴어로 쓰였고 그 당시엔 책은 사치품에 속해서 일반 서민들이 쉽게 군주론을 구해서 읽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에 루소의 주장을 백 퍼센트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어.
다만 군주론을 자세히 읽어보면 독재와 전제정치를 원하는 군주를 위해서 쓰였다기 보다는 군주가 국가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데 필요한 자질을 건의했다고 볼 수 있어. 또 인간의 심리와 본성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를 알려주기도 해.
이와 관련하여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인간들이란 다정하게 대해주거나 아니면 아주 짓밟아 뭉개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고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려면 그들의 복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예 크게 주어야 합니다. - <군주론> 24쪽.
위 인용문도 얼핏 보면 냉혹하게 보일 수도 있고 군주가 포악한 정치를 권한다고 읽힐 수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르게도 생각될 거야. 군주는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야. 마냥 인자하고 너그러워서는 안 되지. 조선의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형제를 죽였고 처가를 풍비박산 냈어.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것처럼 정적이나 잠재적으로 왕권을 짓밟을 수 있는 세력들을 아주 완벽히 짓밟아 뭉개버렸지.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비롯해서 자신의 형제, 처남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돈인 심온 즉 세종의 장인까지 죽였어. 어디 그거뿐이냐? 정적들뿐만 아니라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생사를 함께 한 이숙번 같은 공신들도 숙청해버렸어. 왕권 강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셈이지.
그러고 보니 태종(1367년생)은 마키아벨리(1469년생)보다 백 년 전 사람인데 일찌감치 마키아벨리즘을 실천한 사람이구나. 워낙 피를 많이 묻히고 왕위에 올라서 본인 자신도 '과인은 덕이 없어서'라고 토로한 태종인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니? 사병을 혁파하고 관제를 정비했으며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만든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군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태종이지만 자기 아들인 세종이 빛나는 업적을 세울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잖아.
물론 세종 자신도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태종이 공신과 외척을 제거하지 않았다면 세종은 그들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아. 즉 세종이 세운 업적의 반은 태종에게 돌아가야 해.
태종은 고려 시대 말 과거에 급제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며 비록 왕이 되기 위해서 아버지인 태조에게 반기를 들기도 했지만, 인간적인 고뇌가 왜 없었겠니? 만약 태종이 사사로운 정에 끌려 공신을 끝까지 두둔하고 외척을 그대로 두었다면 조선 시대 초기의 번영은 실현되기 어려웠을 거야. 결론적으로 마키아벨리가 꿈꾼 이상적인 군주는 태종이 이미 실현했던 것이란다.
군주론의 주장이 잘 실현된 태종을 이은 세종 시대의 번영을 살펴보면 군주론이 결코 무자비한 독재를 추구한 책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겠구나.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보다 사랑을 베푸는 자를 해칠 때에 덜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일종의 감사의 관계에 의해서 유지되는데,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취할 기회가 생기면 언제나 그 감사의 상호관계를 팽개쳐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항상 효과적인 처벌에 대한 공포로써 유지되며, 실패하는 경우가 결코 없습니다. - <군주론> 119쪽
위 인용문을 읽어보면 루소가 군주론을 두고 군주를 가르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일반 국민들을 가르친 것이라고 말한 것이 더욱 그럴듯해. 군주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보통 사람들도 윗글을 읽으면 무릎을 '탁' 치게 되거든.
아빠가 군대 생활을 할 때 이런 일이 있었어. 아빠는 후임병들에게 착한 선임병이었단다. 그 당시만 해도 군대 내에서 흔했던 구타를 한 적도 없고, 심지어는 싫은 소리도 거의 하지 않았어. 그저 친절하게 대했고 따뜻한 말만 한 선임병이었지.
반면 나와 반대로 후임병을 대한 동기가 있었지. 어느 날 그 동기와 내가 한 후임병을 두고 각자 다른 말을 했는데 그 후임병은 별다른 고민의 흔적을 보이지 않고 자신에게 무섭게 대하던 내 동기의 말을 따르더구나.
군주론을 통해서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기만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으며 필요하면 언제라도 폭정을 행하는 것이 능사라는 것이 아니란다. 어쩌면 마키아벨리는 타인을 항상 선의로 대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풍부한 '좋은 사람'이 신의가 없고 약속을 자주 어기며 자신의 잇속만 끊임없이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손해를 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냥 착하고 이타적인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내 마음 같지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란다. 군주가 항상 사랑을 베푸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은 물론 위험천만한 일이지. 마찬가지로 우리 보통 사람들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좋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속성을 잘 알아서 본인의 선의를 악용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 군주론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교훈이야.
그렇다면 군주는 짐승의 방법을 잘 이용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 중에서도 여우와 사자를 모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자는 함정에 빠지기 쉽고 여우는 늑대를 물리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함정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여우가 되어야 하고 늑대를 혼내주려면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 <군주론> 124쪽
이 부분이야말로 <군주론>의 핵심이자 마키아벨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이라고 생각해. 말하자면 마키아벨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군주는 사자의 힘과 여우가 영리함을 겸비해야 한다는 거야. 마키아벨리는 사자가 포악함과 여우가 간교함을 군주에게 권한 것이 아니란다.
많은 사람이 마키아벨리가 군주는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만 주목하는데 사실 마키아벨리는 단서를 두었어. 신의를 지키는 것이 군주에게 불리하거나 약속을 맺은 이유가 없어졌을 때는 굳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거든.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주장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이 선한 것은 아니다'라는 전제를 두고 하는 것이란다. 모든 인간이 선하다면 우리는 군주론을 읽을 필요도 없고 애초에 마키아벨리가 쓸 일도 없었을 거야. 불행하게도 이 세상은 착하고 선한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군주론은 아직도 유효한 충고로 남아 있단다.
군주론 - 제4판 개역본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까치,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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