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박정희 100주년을 거쳐 구미는 신격의 지도자를 인간의 자리로 맞이해야 하는 역사의 길목에 서 있다.
장호철
1979년에 죽은 박정희가 한국 사회에 부활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말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부터였다. 박정희가 되살아난 것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집요한 '박정희 부활 공정(工程)' 덕분이었고, 여기에 보수 기득권층이 적극 호응했기 때문이었다.
두 신문은 방대한 분량의 박정희 기사를 장기간에 걸쳐 연재하면서 박정희 향수를 자극했다. 특히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과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이 공정에 대표적인 첨병 역할을 다했다. 친일문인 이광수를 존경하는 소설가 류철균(필명 이인화, 이대 교수)도 소설 <인간의 길>을 통해 박정희를 신성적(神聖的) 수준으로 미화했다.
그들은 박정희를 국가 수호와 경제 발전의 화신으로 부각시켰다. 이러는 동안 박정희의 약점인 '친일'과 '독재'는 지엽적인 것으로 밀려났다. 한국의 보수 기득권층은 친일을 '반공'으로 치환하고 독재를 '국가주의'로 세탁하는 데 기민한 능력을 발휘했다.
박정희 향수는 2000년대 들어 '박정희 신드롬'과 '박정희 신화'를 만들어냈다. 보수신문들은 틈나는 대로 박정희에 대한 여론조사를 벌여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박정희 붐을 재생산하곤 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2006년까지 '난공불락'이라는 말이 걸맞을 정도로 견고하게 1위를 지켰다.
심지어 박정희는 현대사 인물 전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백범 김구보다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5000년 역사를 통틀어서도 세종대왕을 이기고 1위에 오를 정도의 기현상을 보였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 이명박 후보는 검은색 선글라스를 즐겨 쓰고 다니면서 박정희 흉내를 내곤 했다. 이것은 그 해 대선에서 이명박이 승리한 요인과 일정 부분 관련된다. 많은 유권자들이 이명박 후보에게 박정희식 경제 성장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를 통해 처음 정치에 뛰어들면서 "이 나라를 아버지가 어떻게 일군 나라냐?"라고 하면서 출사표를 던졌다고 한다."(동생 박근령 씨 회고)
2012년 2월 21일, 당시 유력한 대선후보였던 박근혜 씨는 서울 마포구 박정희 기념관 개관식 축사에서, "이 기념도서관에 있는 자료와 기록들은 단지 아버지 한 분의 자료가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땀과 눈물로 이 나라를 일궈내신 우리 국민 모두의 자료와 기록"이며, "국가와 국민이 어떤 공감대 속에서 국가발전을 이루어 냈는지, 그 과정에서 지도자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배움의 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해 겨울 그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아직도 많은 국민은 박정희 향수가 본질적으로 일제강점기로부터 대한민국으로 이어진 보수기득권층의 헤게모니 공세라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구경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장세용 후보가 박정희의 아성에서 당선된 것이다.
장세용 구미당선자의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