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미래당 안철수 서울시장 후보가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안 후보 선거 사무실에서 지방선거 캠프해단식에 참석해 발언을 마치고 자리로 이동하고 있다.
이희훈
그는 다시 기로에 섰다. 벌써 세 번째 맛보는 쓰라린 경험이다. 그동안 몸 담았던 곳에서 늘 승승장구해 왔던 그에게는 좀처럼 익숙지 않은 낯설음이다. 의사로서, IT전문가로서, 교수로서, 그리고 방황하는 젊은 청춘들의 멘토로서 눈부신 업적을 쌓아왔던 그이기에 이 상황을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2012년과 2017년 대선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기는 했어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정이 다르다. 대선보다 중량감이 떨어지는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맥없이 고꾸라졌다. 그것도 자신이 사퇴를 종용했던 김문수 자유한국당 후보에게도 뒤쳐진 3등이다. 곳곳에서 조소와 냉소가 터져나오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조심스럽게 정계은퇴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에게 서울시장 출마는 퇴로가 없는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선 패배의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등판한 선거가 아닌가. 게다가 상대는 7년 전 그가 통 크게 양보를 했주었던 박원순 더불어민주당 후보다. 밀려날 수도 밀려서도 안 되는 진검 승부였다. 만약 이번에도 실패할 경우 차기 대선은 고사하고 정치 활동 자체가 위협받는 외나무다리 혈투였다. 지방선거 이후 보수재편을 주도하기 위해서라도 절대 질 수 없는 선거였다.
질 수 없는 선거, 그러나... 그러나 3선에 도전하는 박원순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7년 동안의 재임기간을 거쳐 박 후보는 어느덧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해 있었다. 3선 연임에 대한 거부감을 상쇄시킬만한 안정감과 풍부한 시정 경험을 갖춘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여기에 '문재인 프리미엄'이라는 '어드밴티지'까지 더해졌다. 그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싸움에 뛰어든 셈이었다.
더욱이 선거는 3파전 양상으로 전개됐다. 애시당초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았던 김 후보는 만만치 않은 힘을 과시하며 국면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박 후보의 일방적 독주가 이어지고 단일화 가능성마저 사라지면서 세간의 관심은 2위 쟁탈전으로 모아졌다. 누가 2위가 되느냐에 따라 향후 정치권의 정계개편 과정에서 야권의 보수 재편을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선거 결과 그의 최종 성적표는 3등이었다. 바른미래당 역시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전패를 당했다. 스스로는 말할 것도 없고, 양당제의 폐해를 극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창당한 바른미래당 역시 유권자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은 것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 그는 씻을 수 없는 정치적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궁금하다. 그는 이런 결과를 정말 예측하지 못했던 것일까.
출마를 만류하는 사람이 많았다. 엄청난 산고를 겪은 끝에 바른미래당을 창당했기에 한 걸음 물러나 재충전을 하는 편이 바람직하다는 목소리가 잇따랐다. 숨가쁘게 달려왔던 지난 시간들을 생각하면 휴식이 필요할 법도 했다. 거듭된 선거 출마에 따른 피로감이 그의 정치적 미래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됐다. 노출 빈도가 높을 수록 정치인으로서의 참신함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출마로 마음을 굳혔다. 바른미래당 창당 이후 일선에서 물러난지 두 달여만의 일이었다. 사정은 있었다. 기대와는 달리 지지율이 오르지 않으면서 바른미래당은 지방선거를 위한 돌파구가 절실했다. 당의 간판이자 얼굴인 그에게 'SOS'를 칠 수밖에 없는 다급한 상황이었다. 당내 지분을 양분하고 있는 유승민 공동대표의 불출마 의지가 확고한 이상 그 외에는 달리 뾰족한 대안이 없었던 탓이었다.
일각에서는 그의 등판을 정치활동 재개를 위한 예정된 수순이라 보는 시각도 있었다. 정치인과 연예인은 대중으로부터 잊혀지는 것을 가장 두렵게 여긴다는 속설이 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일선에서 물러나게 될 경우 당내 위상이나 역할, 정치적 영향력이 축소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서둘러 조기 등판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국민의당 시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제보조작 사건으로 당이 발칵 뒤집히자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앞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깊은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갖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정확하게 22일 뒤 그는 "국민의당이 무너지면 거대 양당의 기득권 정치는 빠르게 부활할 것"이라며 당 대표 경선에 뛰어들었다.
22일 동안 그가 어떤 반성과 성찰을 했는지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출마에 우려를 표시했고 심지어 당 내부에서도 만류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의 출마를 두고 당내에서 극심한 내홍이 펼쳐지기도 했다. '선당후사'하겠다며 당 대표 출마 선언을 하자 조직이 사분오열되는 '코미디'같은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당 대표에 오른지 몇 개월 후, 국민의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중도의 함정'에 빠진 안철수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통해 원내 2당으로 도약하려던 그의 야심찬 계획은 이번 지방선거 참패로 송두리째 흔들리게 됐다. 중도 성향의 정치세력을 규합해 집권을 도모하겠다는 그의 구상 역시 현실의 높은 벽 앞에 좌초될 위기에 빠졌다. 이유가 뭘까. 중간지대에 머물면 진보와 보수로 양분된 양극단의 정치에 신물난 유권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른바 '중도의 함정'에 너무 깊숙이 빠져버린 탓은 아니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정치적 성향을 지닌다. 편의상 이를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로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사안에 따라 우연히 얻게 되는 지위일 뿐 '중도'는 개인의 정치적 스탠스를 대변하는 말이 아니다. 대중이 정치를 불신한다고 해서, 무당층이 늘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중도 지향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좋든, 싫든 대중은 정치적 현안에 정치적 의사를 갖을 수밖에 없는 '정치적'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