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주석과 악수하는 김정은 위원장중국을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베이징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방중은 올해 들어서만 벌써 세 번째다. 김 위원장은 3월 25~28일 베이징, 5월 7~8일 다롄을 방문했다. 그리고 이번 6월 19~20일 세 번째 방중이 이루어졌다. 보도를 통해 확인되듯이 세 번 모두 김 위원장은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미국에 본부(서버)를 준 중화권 매체 <둬웨이(多維)>는 20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3차 방중이 지난 두 차례의 방중과 달리 진짜 공식방문의 의미를 띠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 관영언론들은 관례와 달리 처음으로 김 위원장의 방중 사실을 북경 도착 시간에 맞춰 보도했다. 이번 방문에는 1차 때처럼 김 위원장의 부인 리설주 여사가 동반했으며, 김 위원장 부부는 시진핑 – 펑리위안 부부의 연회 접대를 받았다.
김정은 위원장은 방문 둘째 날인 20일에도 시진핑 주석과 오찬을 함께했다. 시 주석은 이 자리에서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中國夢) 실현을 위해 분투하는 중이다. 중국은 조선과 함께 배우고 함께 거울이 돼 단결하고 협동하여 함께 아름다운 사회주의 사업을 열어가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나는 앞으로 중국 동지들과 함께 모든 힘을 기울여 조-중관계를 새로운 수준에 올려놓고, 세계와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역할을 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또한 시 주석은 "김정은 위원장이 100일 안에 세 차례 중국에 와서 나와 회담한 것은 중-조 고위급 교류의 새 역사를 연 것"이라고 했고, 김 위원장은 "조-중은 한 가족처럼 친밀하고 우호적"이라고 화답했다. '한 가족처럼 친밀하고 우호적'이라는 표현은 국가간 외교 수사로는 보기 드문 것이다. 한편 <조선중앙통신>은 19일 열린 연회에서 <김일성장군의 노래> 등이 울러퍼졌다고 20일 보도했다.
혁명 2세대와 혁명 3세대의 만남 북중 양국 정상의 파격에 가까울 정도로 이례적인 세 차례 회동에 대해 다방면에서 여러 각도의 분석과 평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복잡하고 현실적인 접근보다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북한과 중국의 특수한 관계를 밝힘으로써 최근의 북중관계를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한다.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은 1953년 6월생이다. 그가 세상에 나오고 한 달 후에 전쟁을 끝내고 7.27 휴전으로 인해 분단이 고착된 셈이다.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習仲勳)은 중국 서북부의 탁월한 혁명가였다. 그는 김정은 위원장의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을 잘 알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도 만난 적이 있다. 요컨대 시진핑 주석은 혁명 2세대, 김정은 위원장은 혁명 3세대가 된다.
2014년 4월 11일,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국제정세 세미나에서 추이톈카이 주미 중국대사는 북한에 대해 압력을 행사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대해 "불공평하고 불가능한 미션"이라면서, "우리는 한반도, 전체 한반도의 비핵화를 추구한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이것은 중국이 북한의 외교노선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명백하게 표명한 발언이었다. 중국은 왜 이토록 시종여일하게 북한 정권을 비호해 온 것일까? 그것은 세 가지 정도의 이유로 요약될 수가 있다.
첫째, 그동안 중국은 북한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의사가 없었다. 둘째, 설령 의사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북한 정권에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중국은 잘 알고 있었다. 셋째, 북한 정권을 비호하는 것이 중국에도 유익하다고 판단해왔다. 이런데도 한국의 언론들은 중국이 북한에 압력을 넣어 핵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내놓고는 했다. 하지만 이것은 부정확한 진단이었다.
참고로 1968년 미군 함정 푸에블로호가 승무원 83명과 함께 북한에 나포되었을 때, 당시 미국 대통령 존슨은 즉각 소련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최종적으로 확인한 것은 소련의 압력이 북한에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다. 훗날 존슨은 "북한은 참 이상한 나라다. 소련의 영향력도 전혀 미치지 않았다"라고 실토한 바가 있다.
북중간의 역사적 관계를 이해하는데 더욱 요긴한 것은 1958년 김일성(당시 수상)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때 중국 <인민일보>는 '환영 김일성 수상과 조선 대표단'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중국 인민은 북벌의 전화(戰火) 속에서, 장정(長征)의 길에서, 항일의 간고한 세월 속에서, 장개석의 통치를 뒤엎는 승리의 진군에서 조선인민의 우수한 아들딸들이 중국인민과 공동투쟁을 했으며, 자기 생명의 희생을 무릅쓰고 중국혁명과 중국인민의 해방사업을 원조한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1958.11.22. <인민일보>)<인민일보>는 중국 현대사의 험난했던 '네 개의 파고(波高)'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결국 중국인의 혁명과 해방에 기여한 조선인의 '원조'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파격적으로 칭송해 놓았다. 아니, 조선이 중국을 '원조'하다니? 낯선 사실이 아닌가? 이것은 우리의 뇌리에 박혀 있는 역사와는 조금 다를 수 있다.
첫 번째 '북벌'이란 1911년 신해혁명 이래 광동으로 물러나 혁명정부를 수립한 쑨원 등이 북방의 군벌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벌인 중국 내전을 말한다. 쑨원 사후,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가운데 1926년부터 장제스는 공산당의 협조를 얻어 1928년 군벌을 타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신해혁명 과정에서 한국의 신규식(상해임정 창업자)을 필두로 한 독립운동가들이 자금을 지원하고 적극 가담한 것이다.
두 번째 '대장정'이란 1만 5000리에 달하는 중국 홍군의 대행군(1934~1935년)으로, 이 결과 공산당의 혁명 근거지가 중국 동남부 루이진에서 서북부 옌안으로 옮겨졌으며 마오쩌둥이 확고부동한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혁명군은 추격해 오는 국민당군과 계속 싸우면서 18개의 산맥을 넘고 24개의 강을 건넜다. 여기에는 김훈(양림), 무정 등의 조선인이 수백 명 이상 참여했다.
세 번째 '항일의 간고한 세월'이란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제국주의 일본의 패전까지를 의미한다. 중국과 조선은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을 결성하여 치열한 반일 무장항쟁을 벌였다. 또한 조선의용군은 옌안 등지에서 따로 중공 홍군을 도왔다. 여기에는 중국 <인민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정율성 등이 있었다. 특히 태항산에서 일본군의 소탕전에 맞선 최후의 반소탕전에서 조선 의용군의 윤세주, 진광화 등이 분전 끝에 전사했다. 이들의 희생으로 덩샤오핑, 펑더화이 등의 쟁쟁한 중국 혁명 지도자들이 탈출, 보신할 수가 있었다.
네 번째 '장개석의 통치를 뒤엎는 승리의 진군'이란 국공내전을 의미한다. 이 내전의 승부를 가른 것은 동북 대회전이었다. 여기에 최소 6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동북민주연군'의 이름으로 중국 혁명군과 함께 싸웠다. 위기에 몰린 마오쩌둥은 네 번씩이나 김일성에게 밀사를 보내 지원을 요청했고, 그때마다 김일성은 정권 수립 이전의 어려운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