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은 왜 일본서 기부받아 정림사 복원하려 했을까?

“정림사 복원 도와달라” 일본에 2600억 지원 요청... 비판 여론에 중단

등록 2018.07.26 10:45수정 2018.07.2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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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도 경례에 답하는 김종필 전 총리 지난 2016년 5월 13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자신의 모교인 서울 공릉동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2016 자랑스러운 육사인상 시상식에서 생도들의 경례를 받은 뒤 손을 들어 답하고 있는 모습.
생도 경례에 답하는 김종필 전 총리지난 2016년 5월 13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자신의 모교인 서울 공릉동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2016 자랑스러운 육사인상 시상식에서 생도들의 경례를 받은 뒤 손을 들어 답하고 있는 모습.연합뉴스

지난 6월 23일 별세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우리 문화유산 복원에 일본 자금을 끌어들이려했다는 증언이 문헌을 통해 확인됐다. 김 전 총리는 충남 부여에 있는 백제시대 절터인 '정림사지' 복원계획을 세우고,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일본의 불교계 및 정계와 접촉했다.

부여는 그의 고향으로, 생전에 그는 부여의 백제 문화유산 복원을 숙원사업으로 꼽으며 큰 관심을 기울였다. 정림사는 약 1500년 전 고대 백제시대 지어진 절로, 현재는 터와 오층석탑(국보 제9호), 고려시대 석불 등이 남아 있다. 특히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현존하는 2기의 백제시대 석탑으로 그 중요성이 매우 높다.  

<스기야마 토미 1921년 7월 25일생>(눈빛·2011)에 따르면 책의 화자인 스기야마씨와 일제강점기 부여에서 사찰을 운영한 가마타 코묘 주지, 부여문화원 L 원장 등 3명이 김종필 전 총리를 만나 이와 같은 '정림사 복원계획'을 전해 듣고 "재건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공항 귀빈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김종필씨 뒤를 사람들이 줄을 지어서 오더군요. 우리가 앉아 있는 귀빈실에 제1비서, 제2비서 등이 먼저 차례차례로 들어오더니 김종필씨가 들어왔지요. 그때 김종필씨가 이야기한 것은 "아, 저는 어릴 때 가마타 선생님한테 검도를 배웠어요"라고 하면서, 원래는 15분간 약속을 했었는데 30분 이상이나 이야기를 했지요.

거기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었는데, 자기는 부여 정림사를 재건하고 싶지만, 그런 자금을 구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일본에는 전국에 셀 수 없을 만큼 절이 많으니, 그 절에서 1엔씩만 내더라도 재건비가 나올 것 같다. 그러니까 가마타 주지에게 꼭 그 재건을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납니다."(284쪽)


스기야마는 이어 "회견이 생각보다 길어졌고 끝나고 복도에 나오니까 사람들이 쭉 서 있더라고요. 그래서 참 대단하다고 하니까, '이 나라 넘버 투니까, 당연한 거겠죠'라고 주지가 대답을 하더군요"라고 덧붙였다.

"JP가 부여 정림사 재건을 도와달라고 요청하더군요"


 지난 6월 23일 별세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회견한 내용을 담은 '구술' 자서전 <스기야마 토미 1921년 7월 25일생> 표지. 스기야마 토미는 일제강점기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경북 대구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모자점을 경영한 상인이었고 두 살 위 오빠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전사했다. 그는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달성국민학교(현 달성초) 등지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1945년 일본이 패전하자 한국인 제자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후 1970년대 중반부터 한일친선교류 활동을 펼치며 한국을 홍보했다. 그는 한국의 제자들과 재회해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드는 교육을 한 것에 죄의식을 느낀다"며 여러 차례 사죄했다. 그의 제자 중엔 소설가, 일본 주재 영사가 된 사람도 있다. 스기야마와 함께 활동한 가마타 코묘(1914~1998) 주지는 지난 1985년에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백제의 은혜를 갚겠다"며 충남 부여 조왕사에 범종을 기부한 바 있다. 당시 범종의 이름을 영친왕 이은의 부인인 이방자 여사가 썼고, 기증식 때 직접 참석도 했다.
지난 6월 23일 별세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회견한 내용을 담은 '구술' 자서전 <스기야마 토미 1921년 7월 25일생> 표지. 스기야마 토미는 일제강점기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경북 대구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모자점을 경영한 상인이었고 두 살 위 오빠는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전사했다. 그는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달성국민학교(현 달성초) 등지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1945년 일본이 패전하자 한국인 제자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후 1970년대 중반부터 한일친선교류 활동을 펼치며 한국을 홍보했다. 그는 한국의 제자들과 재회해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드는 교육을 한 것에 죄의식을 느낀다"며 여러 차례 사죄했다. 그의 제자 중엔 소설가, 일본 주재 영사가 된 사람도 있다. 스기야마와 함께 활동한 가마타 코묘(1914~1998) 주지는 지난 1985년에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백제의 은혜를 갚겠다"며 충남 부여 조왕사에 범종을 기부한 바 있다. 당시 범종의 이름을 영친왕 이은의 부인인 이방자 여사가 썼고, 기증식 때 직접 참석도 했다. 눈빛
책속엔 JP를 회견한 일시가 정확히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전 단락에서 JP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가마타 주지가 서울에도 갔었다는 진술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1987년께 있었던 일로 추측된다. JP는 왜 일본인들에게 일본 사찰과 접촉해 기부를 받아올 것을 요청했을까. 1926년생인 김 전 총리는 어린 시절, 가마타 코묘 (1914~1998) 스님이 주지로 있던 부여 '본원사'의 일요학교를 다녔다. 이 절은 충남 부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위해 세워진 절이다.

책 속 스기야마 본인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이 일본인 절에 일요학교의 학생으로 온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던 일이었다"고 한다. 스기야마는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태어나 경북 대구에서 소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재조 일본인 출신으로, 자신이 대구에서 다녔던 사찰에도 조선인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다만 스기야마는 당시 시골에 가면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학교를 다니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원래는 조선인 학교와 일본인 학교가 따로 구분돼 있고 교육과정도 각각 존재함) 가마타 주지가 조선인을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조선인에게도 똑같이 문을 열어놨다고 설명했다.


스기야마는 같은 책에서 "김종필씨는 부여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정림사를 재건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어요"라며 "그러니까 '경주는 눈으로 보는 곳, 부여는 마음으로 느끼는 곳'이라지만 아무것도 없다 보니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대통령이라도 되면 말이지요"(284쪽)라고 나름대로 김 전 총리의 의도를 추론했다.
       
가마타 주지가 이후 실제로 일본의 사찰들을 상대로 정림사 재건을 위한 모금 활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뒤 가마타 주지는 1998년 사망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 정계 자금으로 정림사지 복원을 추진하려 했었던 김 전 총리 본인의 진술이 확인됐다.

그는 지난 2011년 말 <부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완의 숙원사업이나 꼭 이루었으면 하는 일들이 있냐"는 질문에 정림사 복원사업을 첫손에 꼽으며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받으려 했다는 일화를 털어놨다. 다음은 JP 본인의 진술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1991년 민자당 대표위원 시절에 정부와 협조하여 정림사복원추진위원회(위원 김원용 문화재위원 등 7인)와 실무위원회(강우방 국립박물관 미술부장 등 9인)를 각각 구성하고, 일본과 공동 복원키로 합의한 후 그 해 6월 5일 일본에서 오부치 케이조(小淵惠三·후에 일본 수상) 당시 자민당 간사장 등 중의원 4인과 실무자 포함 10여 명이 내한하여 부여로 내려가 정림사지, 부소산성 사비루 등을 답사하고 현장에서 복원계획을 설명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온 일본 대표들과 만나 백제유물 발굴비로 88억엔과 정림사지 복원비로 174억엔, 도합 262억엔(한화 약 2633억원) 지원을 요청했으며, 일본 측도 소요비용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한국 문화재위원들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 정림사 복원을 할 수 없다는 반론 제기로 중단되고 말았다.

지난해(2010년) 유병돈 도의원이 중심이 되어 정림사복원건립추진위원회를 창립하여 복원사업을 주도하고 있다하니 그 노고에 격려해 마지 않는다. 정림사 복원의 경우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유 도의원의 어려운 시작은 반드시 훗날 역사가 말해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유 도의원이 지난 2014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한 때문인지 이후론 정림사복원추진위와 관련된 별다른 활동이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 문화재를 일본인들의 자금으로 복원한다는 건..."

김 전 총리는 이후에도 계속 일본 정계에 여러 이유로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지난 6월 별세 소식이 전해졌을 당시 일본 언론들은 1997년 말 한국이 외환위기에 빠졌을 때 JP와 또 다른 지일파였던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 등이 하시모토 류타로 당시 일본 총리를 설득해 한국에 대한 지원을 끌어내려 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그러나 독도 문제 등으로 일본을 비판해 온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자민당 내 반감이 강해 실패했다고 한다.

안재호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문화재 복원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인데 외부의 지원을 받으면 외부의 입김이 미치게 된다"며 "우리 문화재를 일본인들의 자금으로 복원한다는 것은 우리 자존심이 상처입는 거다. 우리의 자립과 자력으로 복원돼야 하는데 우리 정서상 안 맞는다"고 밝혔다.

안 교수는 또 "이런 큰 규모의 복원은 한 적이 없고, 할 수도 없다"면서 "고고학이나 미술사학 쪽에선 그 시대 백제 건축양식을 모르는데 어떻게 복원하냐 하는 문제가 있다. 백제양식의 건물이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 때문에 복원을 할 수 없고, 자칫하면 고려 양식이나 조선 양식 비슷하게 된다든지 그런 염려 때문에 복원을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것이 "고고학계 일반이 공유하는 사고"라고 덧붙였다.

안 교수에 따르면 우리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고대시대 건축물이 일본에 남아 있다고 한다. '호류지(法隆寺)'와 '도다이지(東大寺)'가 그것으로, 학계에선 백제 불교문화와 미술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 영향을 줬기 때문에 이들 사원양식과 백제의 그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우리가 고대 사찰을 복원할 때 이러한 건물들을 연구해 복원에 참고할 순 있지만, 일본으로부터 직접 자금을 받아 복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김종필 증언록>(중앙일보·2016)에선 "5천년의 가난을 벗어나 '남에게 신세지지 않는 나라 한 번 만들어보자'고 궐기한 군사혁명..."(1권 11쪽)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김 전 총리는 왜 굳이 일본의 자금을 지원받으려 했을까. 또 일본은 어떤 의도와 조건으로 자금을 지원하려 했던 것일까.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한국이 돈이 없어서 가난할 때도 아닌데 이해하기 힘들다"면서 "백제가 일본 문화에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에 그걸 생각해서 요청한 건 아닐까 싶은데, 일본이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의 뜻을 전한다고 하면 명분이 될 수 있지만 그것도 아니고 황당한 이야기"라고 밝혔다.

김민철 연구위원은 그러면서 "김종필씨로선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나 파워가 일본에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걸 상징하는 것"이라며 "(박정희 정부 시절) 식민지배의 대가로 무상으로 3억 달러를 받았다고 하지만, 뒤로 6000만 달러를 또 받아서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썼다. 당시 6000만 달러는 일본 재벌과 우익들이 만들어준 거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같은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 연구위원은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만주군 출신들이 일본 정계에 만주국으로 이어진 인맥들이 많았다"면서 "1960년대에 권력 핵심에 만주국 군관료 출신들이 전면 배치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쪽과 끈끈한 연대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김종필은 그걸 마지막까지 갖고 있던 세대다. 식민지 시대의 유산과도 연결돼 있는 것"이라며 "김종필로선 그걸 가져와 쓰는 거에 크게 거부감이 없었던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한반도 최대 규모로 지어졌던 일본 신사였던 '부여신궁'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일제는 고대 일본과 관련이 깊은 지역이었던 충남 부여를 지목해 1939년부터 화려한 신궁을 건설했으나, 1945년 일제 패망으로 공사가 중단됐다.

김 연구위원은 "일제가 일본과 조선이 조상이 같다고 선전하면서 부여에 신궁을 세우려 했던 것과도 연결될 것 같다"면서 "부여신궁을 조성할 때 우리나라 지식인들도 노동하러 가고 했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김종필은 속엣말을 할 수 있는 중요한 파트너이기 때문에 지원하면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던 걸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김종필 #일본 #구술 #자서전 #정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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