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강물 속에 담아놓은 별빛의 서정

[리뷰] 정양주 시집 '별을 보러 강으로 갔다'

등록 2018.09.20 13:56수정 2018.09.20 13:56
0
원고료로 응원
하류로 가고 싶다

속으로 흘러온 골짜기의 물을 만나
갈수록 맑아지는 강물처럼
살아가면서 만난 사람들로
저렇게 내일이 맑아진다면
산 구비마다 함께 따라온 모래들이
넉넉한 모래밭 이루고 강물을 품어
남은 기억을 가끔 반짝이게 한다면


지난 태풍에 살아남은 미루나무들
은빛 서늘한 물그림자
강물 흐름 속에서 굽어졌다 일어서며
서로 겹쳐지는 긴 가락을 따라
등 기대어 일어서기도 주저앉기도 하면서
조금씩 맑아지는 하류로 가고 싶다
어두운 이 마을을 지나서
 
별을 보러 강으로 갔다

이팝나무꽃 올려다보다 은하수가 그리웠다
피아골 물보라는 하늘 올려다보며 흐르고
골짜기는 어두워 별이 보이지 않았다
별을 찾으러 산을 내려와
섬진강 모래사장 강물 속에 뜬 별을 보았다
바람이 불어도 소쩍새가 울어도
별이 강물 속에서 튀어 올랐다
튀어 오른 별은 모래알이 되고
밤이 깊어지자 속삭이듯 이야기 소리 들리고
어둠 속에서 걸어나온 찔레꽃 향기가
어깨를 토닥였다
혼자 놀지 마라
혼자 우는 눈물 맛에 취하지 마라
어둠보다 더 검은 강물도
멧비둘기 구구구국 울음소리에 일렁이고
마른 꽃잎 하나 떨어져도 파문이 인다
별들도 끼리끼리 모여 밤을 건너고
해가 뜨자 강은 별로 가득 차고
어깨 부축이며 함께 살아온 이름을 세다
지난밤 스무 살까지 다녀온 나는
강가에서 붉게 일렁이는 별을 본다
 

여산여수, 가을 물처럼 투명하고 애잔해지는 시력 30여 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상에 처음 꺼내놓는 정양주 시인의 첫 시집이다. 시의 울림은 단아하면서도 올곧은 성정을 느끼게 하는 시들로 찬찬히 맑고 깊은 물처럼 젖어들게 한다. 그 바닥엔 추억과 그리움과 슬픔이 오롯이 흘러간다. 
 

<별을 보러 강으로 갔다> 시집 표지 ⓒ 문학들

 
발문을 쓴 곽재구 시인의 말처럼 그의 시는 "외로운 것들, 쓸쓸한 것들, 이름 없는 것들"에 대한 따스한 연민이며 그러한 정조를 통해 시적 대상과 공간을 정제된 슬픔으로 재창조한 세계이다. 그것은 망자의 집을 환히 밝히는 마지막 불빛이며 봉분마저 낮아져 다시 산으로 돌아가고 있는 누이의 무덤이기도 하고 '몸을 돌려주고 어둠만 남은' 동백꽃이기도 하다.

지상에 핀 꽃들과 나무들과 하늘을 날다 떨어진 새들까지 그의 눈길을 통해 마주치는 것들은 한결같이 저마다 고유하게 반짝이며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 것들이다. 그 속에 남몰래 혼자 우는 시인의 모습이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눈 내리는 날에 붉게 꽃을 피워내는 넝쿨장미처럼 견디며 살고자 하며 함께 하류로 가서 '강물 속에 뜬 별'을 보는 세상을 꿈꾸는 시인이다.

시인은 오랜 세월 가을 강물 속에 담아놓은 서정을 다듬고 다듬어 맑은 별빛으로 이 한 권의 시집에 그려내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는 시를 진정 아끼며 정성스럽게 담아낼 것이다. 그것이 비록 또 눈물을 쏟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눈물로 '처음 쓴 시를 고쳐 쓰고, 울렁이는 가슴으로 꽃잎을 밀어 올리'는 그만의 시의 집에서 부디 오래오래 살아내길 기대해 본다.

* 정양주 시인은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9년 <무등일보> 신춘문예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기간을 포함하여 30여 년 동안 중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시를 쓰고 있다.

별을 보러 강으로 갔다

정양주 지음,
문학들, 2018


#정양주 #별을 보러 강으로 갔다 #문학들 #신남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인, 리뷰어. 2013년 계간 <문학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명왕성 소녀>(2023), <물 위의 현>(2015), 캘리그래피에세이 <캘리그래피 논어>(2018), <캘리그래피 노자와 장자>, <사랑으로 왔으니 사랑으로 흘러가라>(2016)를 펴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금반지 찾아준 사람이 뽑힐 줄이야, 500분의 1 기적
  2. 2 '윤석열 안방' 무너지나... 박근혜보다 안 좋은 징후
  3. 3 '조중동 논리' 읊어대던 민주당 의원들, 왜 반성 안 하나
  4. 4 "미국·일본에게 '호구' 된 윤 정부... 3년 진짜 길다"
  5. 5 채상병·김건희 침묵 윤석열... 국힘 "야당이 다시 얘기 안 해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