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 선생무위당 장일순 선생
무위당 사람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한국현대사의 거칠은 들판에서 그때마다 일관된 자세로 시대정신을 구현하면서 정직하게 살아온 야인이다.
'일관→시대정신→정직'이라는 등식의 생애가 여간해서 성립되기 어려운 한국적 풍토에서 그는 그것을 해내었다. 역풍과 반동이 극심했던 시절에 선생은 의롭게 살았고, 그래서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무위당의 길은 20세기 후반 한국 지식인으로서 걷기 쉬운 노선이 아니었다. 선생의 삶은 몇 단계로 분류된다.
첫 단계, 미군 대령의 국립 서울대학 총장 부임에 반대투쟁한 학창시절,
둘째 단계, 혁신정당으로 국회의원 총선에 나왔다가 실패한 청년시절.
셋째 단계, 중립화평화통일론을 주창했다가 5ㆍ16쿠데타세력에 투옥된 30대 시절.
넷째 단계,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고자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한 중년시절.
다섯째 단계, 지학순 주교 등과 박정희 독재 정권에 투쟁시기.
여섯째 단계, 민청학련사건 관련자와 민주인사들의 보호시기.
일곱째 단계, 농민ㆍ노동운동을 생명운동으로 승화한 시기.
여덟째 단계, 민주세력을 통일운동으로 결집한 민족통일국민연합 시기,
아홉째 단계, 도농직거래 조직인 '한살림'의 창립시기.
열번째 단계, 본격적인 생명사상운동 시기.
이것은 필자의 임의적인 분류이다.
중년 이후에는 몇 가지 사업(과제)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선후가 바뀌어 추진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때도, 어느 것도 사적인 이해를 취하거나 명예를 탐하지 않았다. 물론 세속적인 욕망과도 거리가 멀었다.
선생은 시대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찾았고 소임을 마다하지 않았다. 역사를 통해 자신의 삶과 가치관을 정립하고 역사에서 자신이 서야 할 자리를 아는, 그리고 그 자리를 자신의 것만으로 굳히려 하지 않았다. 주어진 역할을 진득하고 충량하게 실천하고 빈자리를 남겼다.
그를 만나본 이들은 말한다. 도인(道人)인가 하면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는 소탈한 성품이고, 곰살갑고 다정다감하였다고. 일부 진보적 인사들의 의식이 마치 봉인된 병속에 갇힌듯이 도그마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고 더러는 과격한 주장을 펼 때에도 선생은 한결 같았다. 궁핍함 속에서도 생활의 여유가 있었고 분망함 속에서도 유유자적하였다. 그리고 늘 소외되고 핍박받는 민초들과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