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가결> 박 대통령 국무위원 간담회 참석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016년 12월 9일 오후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이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위원 간담회에 황교안 국무총리와 함께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는 '수첩공주'라는 별칭이 있다. 2004년 당시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 대표로 취임한 이후 붙여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주요 현안에 대해 말할 때 수첩에 적힌 내용대로 따라 한다 해서 생긴 달갑지 않는 수사다. 그러나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던 이 별칭은 이후 이미지 쇄신 작업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박 전 대통령은 2011년 10월 '수첩공주'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여러분의 좋은 의견을 잘 듣고, 잘 적고 반드시 실천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며 이미지 개선에 나섰다. 수첩에 메모하듯 여러 의견을 잘 경청해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취지였다. 새누리당(현 한국당) 역시 2012년 대선 과정에서 "'수첩공주'라는 별명은 '원칙, 신뢰, 약속'의 상징이 됐다"며 적극적인 홍보를 펼치기도 했다.
이후에도 박 전 대통령은 수첩을 가까이 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그는 '원칙, 신뢰, 약속'을 강조하던 대선후보 시절의 '수첩공주'가 아니었다. 박 전 대통령은 불통인사를 고집하는가 하면, 시대를 거꾸로 돌리는 권위주의적·독선적 국정운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의 수첩은 이후 불통과 독선의 상징이 됐다.
수첩은 박 전 대통령을 파국의 수렁으로 밀어넣는 불씨가 되기도 했다. 참모들이 박 전 대통령을 따라 수첩에 깨알같이 메모한 것이 훗날 사달이 났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노트에는 K스포츠·미르재단 모금을 비롯해 박 전 대통령의 지시 사항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었다. 이 기록들은 박 전 대통령에게 적용된 혐의 중 뇌물,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강요죄 등을 입증할 주요 단서가 된다.
실제 박 전 대통령의 1심 판결에서 재판부는 안 전 수석이 작성한 업무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김세윤 부장판사)는 2018년 4월 6일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기업총수 등 외부인과 독대가 끝나면 박 전 대통령이 안 전 수석을 불러 대화내용을 불러주고, 안 전 수석이 그대로 받아 적었다"며 "수첩기재 사항이 외부인과의 독대 내용을 전적으로 증명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박 전 대통령과 안 전 수석 사이에 독대내용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는 점은 인정된다"고 적시했다.
박 전 대통령의 지시사항이 적혀있는 '안종범 수첩'이 직접증거는 될 수 없지만 간접증거는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항소심 역시 같은 판단이었다.
2018년 8월 24일 열린 항소심에서 서울고법 형사4부(김문석 부장판사)는 "(수첩의 내용은) 박 전 대통령이 어떤 내용의 지시를 했다는 안 전 수석의 진술을 증명하기 위한 것으로 진술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2심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지시한 부분에 대해서만 증거능력을 인정했고, 기업 총수들과의 면담 내용을 받아적은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안종범 수첩'은 '태블릿PC', '캐비닛문건'과 함께 박 전 대통령의 유죄를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스모킹 건'으로 손꼽힌다. '수첩공주'라 불릴 만큼 수첩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던 박 전 대통령이 바로 그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진 셈이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또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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