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관기 복장의 기생을 담은 그림엽서. 이들도 국채보상운동에 기꺼이 참여했다.
<말하는 꽃> 기생 도판
앵무가 의연금을 낸 뒤 대구 권번의 기생 14명도 적게는 50전에서 많게는 10원까지 모금에 참여했다. 이에 평양의 주희(酒姬) 31명은 "우리가 비록 천업(賤業)을 하고 있지만, 백성 된 의무에 신분 고하가 다를 수 없다"며 성금 32원을, 또 다른 평양기생 18명도 50전씩 내어 모금에 동참했다.
대구뿐 아니라 경남, 황해, 평안, 함경지역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참여는 전국적이었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등 4개 신문에 실린 국채보상 의연자 명단에서 여성은 모두 1821명이었는데 그중 양반과 유지 부인층이 63%, 기생과 주희 등이 무려 21.8%에 달할 정도였다.
노비, 백정과 함께 '팔천(八賤)'으로 불린 기생은 사실상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천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백성의 일원으로 자임하며 쌈짓돈을 털었다. 그것은 더디게 진행되던 개화와 함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종의 인간선언이기도 했다.
나라의 위기에 여성들이 힘을 모은 사례는 있지만 '여성이 국민이 된 권리와 의무를 내세우면서 독립된 참여와 활동'은 국채보상운동에서 처음이었다. 망국의 위기에 처하면서 마침내 여성들이 남녀동등의 권리를 인식한 것이었다. 나라를 살리고자 한 모금운동을 통하여 바야흐로 여성들의 근대적 각성이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거금 100환을 서슴없이 낼 만큼 당시 앵무는 재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마흔여덟 살의 앵무는 당시 기계(妓界)에서 나름의 지위를 굳히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12년 후에 성주 용암들에 큰돈을 들여 제방을 쌓았고, 1938년에는 교남학교에 2만 원 상당의 토지를 희사했다.
1895년 감영제(監營制)가 사라져 관기(官妓) 제도가 무너지면서 급격한 변화에 내몰린 기생들은 기생조합의 설립으로 대응했다. 관기 정염이 대구기생조합을 세운 것은 1910년 5월이었다. 1914년 일제는 이를 일본식 이름인 '권번(券番)'으로 바꾸게 했다.
달성권번 초대회장 염농산
소속 기생이 32명으로 경성을 제외한 지역 기생조직으로서는 수원 다음으로 큰 조직이었던 대구기생조합이 '대구권번'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20년대 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7년 1월에 자본금 1만2천 원으로, 기생의 화대 취입 지불 금융합작회사인, 대구권번의 전통을 이어받은 달성권번을 설립한 이가 염농산이었다.
염농산이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919년 5월이다. 바로 우리가 찾아가는 용정리 용암파출소 옆에 세운 '염농산 제언 공덕비(廉隴山堤堰功德碑)'라는 빗돌에서다. <성주군지(星州郡誌)>(1996)에 따르면 성주 용암에는 매년 큰 물난리가 나서 마을이 피폐했는데, 염농산이 나서서 속칭 '두리 방천'을 쌓았고, 마을 사람들이 이를 기려 이 빗돌을 세운 것이라 한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성주 용암면 용정리에 닿은 것은 정오가 겨워서였다. 용정2리를 먼저 찾아 경로당 노인께 여쭈니 아무도 빗돌 따위는 모르고 있었다. 인터넷 기사로 용암목욕탕 앞이라는 걸 확인하고 가보니, 양옥 옆에 담을 세워 따로 만든 공간에 비석은 갇힌 듯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