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후 경희대학교 학생들이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양수업 통폐합에 반대하며 ‘후마니타스 장례식’을 열었다.
김종훈
2003년 경희대학교 영어학부에 진학했다. 영세 자영업자의 딸로 지방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며 간신히 '인(in) 서울'을 목표로 할 정도의 성적을 유지했던 내게, '경희대 서울캠퍼스 영어학부 입학', 그것도 '4년 전액 장학생 입학'은 그 자체로 생애 다시 없을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원했던 통번역학을 전공하면서 허탈함과 박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전공 과목 수업을 들어가면 외고 출신, 외국 체류/교환학생/유학 경험이 있는 학생들이 즐비했고, 그 사이에서 '순수 국내파'인 나는 잘해도, 못해도 순수 국내파여서 주목받곤 했다.
어떤 교수는 첫 통역 수업 때 나의 프로필을 읊어대며 이렇게 말했다.
"넌 어디 이름도 못 들어본 시골 인문계고 출신에, 해외 경험도 없네? 나중에 남자라도 잘 만나서 외국물 한번 먹어야겠구만."
이듬해, 통역 수업에서 선전하는 나를 보고 첫 학기의 그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듯,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야 너, 너 어디 출신이랬지? 아버지가 어디 교수시랬나?"
숟가락 공장집 딸인 나는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고, 그는 양손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더러 "대단하다"고 했다.
나의 전공 필수 수업은 이런 수모가 아무것도 아닌 듯 이어지는 곳이었다. 그런 분위기에 진절머리가 났다. 인성도, 가르치는 기술도, 학생들 잘 가르칠 마음도 없이 '스펙' 하나로 그 자리를 꿰찬 교수는 수업 준비도 해 오지 않고 자기 책이나 강매하며 횡포를 부렸다.
대학이란 무엇인가
대학이란 곳이 얼마나 빈껍데기 같은 곳인가를 알아가던 그 무렵, 우연히 들어간 영문학 전공 수업은 내게 완전히 다른 세상을 열어주었다. '소설의 인간학' '서구 문명의 이해' 같은 제목을 달고 있던 영문학 전공 수업에서는 그 동안 한번도 물어본 적 없고 들어본 적 없었던 거대한 질문들을 내게 수시로 던져댔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는가"
"나는 어떤 물음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어떤 세상에 살고 싶은가"
대학 후반부 내내, 이런 질문들을 안고서 길을 걷고, 책을 읽고, 알바를 뛰었다. 그 전엔 그저 내 한 몸,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만 생각했는데 이런 질문들을 안고 걸으면 나를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을 둘러싼 세상이 보였다. 그 질문들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해보고 싶었고, 석사 공부를 시작했을 때 드디어 '진짜' 대학 공부라는 걸 하게 되었다고 느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유학을 준비하던 때, 앞의 저 질문을 던져주었던 이는 경희대학교에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세웠다.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 자리에 있던 그를 찾아가 인사했을 때만해도, 나는 아직 그를 '내 인생의 스승'이라 여겼다. 그가 세운 '후마니타스 칼리지'가 자랑스러웠고, 기대도 컸다.
후마니타스라는 이름처럼 인문 가치를 실현하는 대학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그렇게 기대했다. 내게 그 길을 열어 보여준 사람이 세운 곳이니까,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읽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 자기 반성과 성찰, 세상을 향한 질문을 사유의 핵심으로 삼는 사람으로 사는 법을, 나는 그에게서 배웠으니까. 그리고 그 가르침이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믿었으니까 말이다.
그것은 진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