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고려인 초기 정착 사진
고려인독립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
러시아 애칭으로는 제냐, 김 예브게니가 말한다.
"할머니 엄마가 조선에서 독립운동을 했어요. 일본군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같이 싸웠어요. 싸움에서 졌고 러시아로 도망쳤어요. 호수? 강 같은 것이 있어서, 그 길을 건너 러시아까지 걸어갔어요."
아마 '두만강'을 가리키는 것일 게다. 많은 고려인이 두만강을 넘었다. 첫 세대는 '생존'이 이유였다. 이주 기록이 최초로 문헌에 담긴 1863년 이전에도 국경을 넘는 일은 빈번했다. 봄에 몰래 연해주로 가 주인 없는 땅에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 돌아오곤 했다(계절출가). 국사교과서를 펴면 수탈과 세도정치가 나오는 그 시절이었다. 굶어죽지 않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대흉년이 들자 마을 전체가 이주를 시도하기까지 한다. 수만 명으로 불어난 러시아땅 조선인들은 지신허(남우스리스크 포시예트)에 정착한다. 고종 폐위 이후 항일의병이 대거 연해주로 이동하는 등 일본의 압제를 피해 국경을 넘는 이들도 늘어간다. 예브게니가 들려준 일본군과 싸운 할머니 이야기가 여기 속하겠다.
"할머니의 엄마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걸어가서 살게 됐고. 다시 하바롭스크까지 갔어요. 거기에 고려인 사람들 많이 계셨어요."
기록에 따르면, 초기 한인 마을인 개척리(블라디보스토크 포그라니치나야)에는 수십 리에 걸쳐 집들이 늘어섰다고 한다. 초가집과 조선어 간판은 흔했다. 1890년대 말 시행된 러시아 제국의 인구조사는 조선말 하는 사람을 2만 6천 명이라 밝혔다. 1900년대 초에 이미 연해주 한인(고려인) 마을만 32개였다.
규모 있는 마을들은 저마다 자치공간을 형성하려 애썼고, 색중청과 같은 한인 자치기구를 조직해 마을 내에서 자율적으로 임원을 뽑아 분쟁과 시비를 가리는 등 치안활동과 관혼상제 등을 챙겼다.
연해주는 고려인들에게 생존 문제에서만 '희망의 땅'이 아니었다. 당시 10월 혁명과 내전으로 러시아는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러시아로 이주한 이들은 문화를 지키면서도 세계 흐름과 함께 움직였다. 볼셰비키와 연대해 러시아 내전(적백내전)에 참여하기도 하고, 권리 향상에 영향 받아 각지에서 민족인민위원회 한인(고려인)분과 설립을 꾀하기도 한다.
조선에서 만세시위가 있던 해(1919년)에 연해주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열린다. 그 다음해 독립문을 본뜬 기념비가 신한촌에 세워진다. 1908년 <해조신문>을 시작으로 한글신문이 발행되고, 1917년 이전까지 45개 정도였던 한인 초급학교는 20년 뒤에는 287개로 증가해, 학생만 2만여 명이라 했다. 이를 고려할 때 당시 국내(조선)보다 문맹률이 낮으리라 추측된다. 연해주는 그런 땅이었다.
보석상자와 고려 사투리
그러나 내 앞에 앉은 고려인 4세는 할머니의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애를 먹는다. 한국말이 서툰데다 역사책에나 나올 단어들로 가득한 선조들 역사를 전하는 일은 어렵다.
"일본군이 잡으러 왔고, (증조할머니의) 남편은 잡혀가기 전에 할머니의 엄마에게 보석상자를 주었어요. 그것을 가지고 도망쳤어요."
증조할아버지가 생사를 오가는 순간에 증조할머니에게 건넸다는 '패물함'은 '보석상자'가 된다. 패물함이라는 단어는 낯설다. 이야기는 순간 보석상자를 주고받는 연인들의 낭만으로 둔갑한다.
그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이 정도다. 증조할아버지가 겪은 위기는 1918년 러시아 내전을 틈타 연합국 소속으로 러시아에 상륙한 일본군의 탄압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몇 대를 거쳐 구전된 이야기는 사라지고 지워진다.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던 고려인의 역사는 언어마저 갈라놓았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고려인 3~4세가 '고려 사투리'밖에 할 줄 모르는 조부모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어떻게 대화를 나누느냐고 물으니, 할머니가 한국말로 하면 자신은 러시아어로 답한다고 한다.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어렵게 들은 옛이야기를 고려인들은 한국에 와 다시금 전한다. 자꾸만 이들에게 "누구냐"고 묻기 때문이다.
"어릴 때 자주 물었어요. 우리 할아버지 훌륭한 사람이에요? 무슨 일 때문에 할아버지 그렇게 됐어요? "
항일 의병장이었던 고조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던 이는 한국에 와서 "고려인이면 고려시대 살았던 조상이냐?"라는 질문을 받는다. 때로는 우즈베키스탄 결혼이주 여성으로, 조선족으로, 아니 그냥 외국인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들은 반복해 자신의 뿌리를 보여준다. 부모의 부모를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라진 증거(족보, 공문서 등)가 아쉽고, 마음처럼 안 되는 의사소통이 답답하다. 김 예브게니도 단어를 고치고 고치다가 중얼거린다.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한국에 와서야 한국어를 배웠다. 드디어 할머니와 손자가 같은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비행기로 반나절 이상을 가야 하는 곳에 떨어져 있다. 그의 할머니는 우즈베키스탄에. 그는 이곳 안산, 고려인들이 모여 사는 안산 땟골마을(선부동)에 있다.
도돌이표로 돌아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