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강제이주와 분산 경로고려인 강제이주와 분산 경로
DIVERSE+ASIA
강제이주의 이유를 흔히들 '일본인 간첩 활동 방지'라고 여긴다. 강제이주 명령서가 공식적으로 밝힌 바이기도 하다. 일본은 연해주(극동) 지역 한인을 일본 신민이라 칭해온 터였다.
그런데 고려인만 강제이주한 것이 아니다. 고려인 이주가 성공(?)한 후 타탈, 체첸, 칼무크족, 독일인, 폴란드인 등 다양한 민족이 이주 대상에 올랐다. 나머지 인구를 영토 전반에 배치하려는 구상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소련은 광활한 땅이었다.
1924년 연방 이주위원회가 창설된다. 전 영토에 걸쳐 인구·지정학적 상황·토지 상태 등을 조사했다. 이주 사업과 경작지 개척에 재정의 1/3 규모의 자금을 투여한다. 그만큼 사활을 건 정책이었으나 사람의 터전을 옮겨 이주시키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기근과 내전(러시아 백군)이라는 방해 요소도 문제였다.
중앙아시아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러시아 주민 중 반 이상이 사업 첫해(1928년)에 원래의 거주지로 되돌아간다. 소련은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정착 말고는 살 길이 없는 이들. 중앙아시아행 열차에 오른 고려인들은 통행증을 빼앗긴다.
값싼 노동력이 도착하다
국내 여러 연구가 고려인 강제이주 원인을 밝히고 있다. 진짜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것만은 확실하다. '필요'에 의해 하루아침에 수십만 명이 터전을 잃고 이주당했다. 이때 '필요'는 그 땅에 사는,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것이 아니었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인 태알렉셰이는 시베리아 한복판을 달리는 열차에서 사람들을 향해 이리 말했다.
"정부는 전 인민이 결정한 헌법을 어기고 있다. … 토지가 집단농장의 소유임을 무시하고, 집단농장을 이주시키고 있다. 고려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곳 지역에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존경받지 못하고 소수 민족으로 보낼 것이다."
- 톰스크문서보관서 소장자료 [특별보고 1호. 고려인 추방과 관련한 정치적 분위기와 추방작업 진행도] (이상근 대불대학교 교수의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과정 및 정착과정> 논문에서 재인용)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의 결정이 무시된 채 집단농장이 옮겨졌다. 고려인의 삶을 연구해 온 송잔나 모스크바 고등경제대학 교수의 저작 <소련의 이주 정책과 고려인 강제 이주>중 눈에 띄는 문장이 있어 가져온다.
"17만 2천명의 값싼 노동력이 중앙아시아에 도착했다."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이주 가능한 집단이 우선 옮겨졌다. 갈 곳 없는, 조직될 가능성 없는, 보호막 없는, 나라가 없는, 식민지 사람들이. 소련이 헌법을 개정해 '전 인민의 국가'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 1936년,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가장 힘없는 민족이 활용됐다. 민족 내 위계가 형성되고 그것이 비용으로 매겨졌다.
통행증 빼앗긴 삶을 반복하나
한국에 온 지 2년이 되었다는 이유지아나씨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유지아나의 할머니는 강제이주 때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왔다. 그의 할머니는 연해주에 놓고 온 재산 중 가장 아까운 것은 '돼지'라고 했다. 집에서 키우던 가축들. 문득 궁금해져 물었다. 한국에 오느라 놓고 온 것 중에 가장 아까운 것이 무엇이냐고.
유지아나씨는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전직 의사, 변호사, 교수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다들 고려인이다. 그녀가 일하는 영세한 공장에는 고려인이 다수라 했다. 그녀는 놓고 온 무엇 대신 그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도 한국에 오기 전 중국과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공부하고 싶었다.
"영국에서 교수 가족이 물었어요. 몇 년 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대답 못 했어요."
무엇이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앞에서 강제이주 이야기를 들려주던 최멜리스씨는 플루트를 전공한 음악 교사였다. 한국에 처음 와서 청소 수거 일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 온 지 10년째다.
현재 고려인들이 일할 수 있는 제조업은 중소사업장 이하로 제한되어 있다(방문취업비자 H-2 허용업종). 그러니 대부분 영세사업장 일용직으로 일한다. 국내 고려인 67%가 단순노무직에 종사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2014년 국내 거주 고려인 동포 실태조사)
강제이주를 당한 고려인들이 연해주에 두고 온 것은 단지 농지와 가축이 아니었다. 한인 학교, 잡지와 언론사, 자치·정치 조직 등 단지 살아간다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연해주에 정착한 50년 동안 가꾼 삶의 터전, 아니 그 삶을 가져오지 못했다.
유지아나씨는 한국에 자신의 삶을 가져왔을까. 80년 전 강제이주 열차에 올라탄 고려인들은 통행증을 빼앗겼다. 자유로이 이동할 수 없게 됐다. 그곳에서 미개척지를 일구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 주어진다.
선조들의 땅에 와서, 변두리 공단 도시로 삶을 이주한 그녀는 한국 사회에서 통행증을 가진 존재일까.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낯선 땅에 도착한 조부모와 유지아나씨가 자꾸만 겹쳐 보인다.
다음 편에서는 강제이주 후 중앙아시아에 정착해온 고려인들의 삶을 보려 한다. 강인한 성취이자 다시금 무너질 토대였다. 고려인 3·4세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이기도 하다.
[관련 기사]
①
고려인, 어디 사람이니? ☞ http://omn.kr/1i6bl
②
'나는 누구인가'... 항일 의병장 자손의 씁쓸한 고백 ☞ http://omn.kr/1iero
'고려인 독립운동 기념비' 건립 비용 모금을 위한 기획 연재를 진행합니다. 펀딩 사이트 <같이가치>에 공동 게재되고 있습니다. 고려인 독립운동 기념비는 연해주 등지에서 이뤄진 고려인의 항일항쟁 역사를 대한민국 땅에 적어내리는 기록입니다. 낯선 땅에서 굴하지 않고 삶을 지켜낸 이들, 더 나아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웠던 그러나 이름 없이 잊힐 수밖에 없던 수많은 이들을 기억하는 작업에 함께해주시길 바랍니다. 고려인 독립운동 기념비 건립 5만 명의 건립자가 되어주세요. - 고려인독립운동 국민추진위원회
☞ 기념비 건립 모금을 위한 스토리펀딩 사이트 바로가기 http://bitly.kr/rx8E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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