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리스트 유죄' 김기춘, 양승태 발목 잡을까

[분석] 1심과 달리 직권남용죄 인정... '직무권한' 다투는 사법농단 재판에 영향 줄 수도

등록 2019.04.17 18:32수정 2019.04.17 18:32
1
원고료로 응원
a 재구속되는 김기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2018년 10월 5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박근혜 정부의 보수단체 불법지원 (일명 ‘화이트리스트’) 관련 선고심 실형을 선고 받고 구치소로 향하는 호송버스에 오르고 있다. 김 전 실장은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법정 구속 되었다.

재구속되는 김기춘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2018년 10월 5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박근혜 정부의 보수단체 불법지원 (일명 ‘화이트리스트’) 관련 선고심 실형을 선고 받고 구치소로 향하는 호송버스에 오르고 있다. 김 전 실장은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법정 구속 되었다. ⓒ 이희훈


"원심판결 중 피고인 김기춘에 대한 부분을 파기한다."

지난 12일 서울고등법원 형사4부(부장판사 조용현)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전국경제인연합을 동원, 보수단체를 불법 지원한 '화이트리스트' 사건에서 1심 판결을 뒤집었다. 김 전 실장은 징역 1년 6개월로 유지됐지만, 재판부는 중요한 대목에서 이전과 다른 결론을 내렸다. 김 전 실장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아래 직권남용죄)' 혐의다. (관련 기사: '화이트리스트' 김기춘, 2심도 징역 1년6월… 조윤선은 집행유예)

이 죄는 말 그대로 공무원이 자신의 권한을 남용해 다른 사람에게 안 해도 되는 일을 하게 하거나 그의 권리를 방해하는 것을 뜻한다. 이때 범죄 여부를 판단하는 출발점은 공무원의 행위가 그의 권한범위 내에서 이뤄졌느냐다.

화이트리스트 사건 1심(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재판장 최병철 부장판사)은 여기서부터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전경련에 특정단체의 지원을 요구하는 것은 대통령 비서실장의 직무권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이 자체가 불법이긴 하지만 직권남용죄는 성립하지 않고, 강요죄만 인정된다고 했다.

1심 재판부는 형식 면에서도 직권남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자신의 권한을 남용해 벌인 일이 정상업무(직무집행)처럼 보여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 청와대는 전경련에 보수단체 지원을 요청하며 공문을 보내는 등의 업무 형식을 갖추지 않았고, 이 일 자체도 청와대 안에서 은밀히 이뤄졌다. 재판부가 화이트리스트 지시·실행은 직무집행도 아니라고 판단한 이유다.

뒤집힌 '화이트리스트' 판결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가 직권남용죄 요건을 너무 좁게 해석했다며 다르게 판단했다.


대통령의 직권은 넓고 다양하다. 그를 보좌하는 대통령 비서실도 마찬가지다. 1심은 이때 법률에 근거해 대통령 비서실의 직무권한 범위를 따져야 하는데, 관련 규정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12일 항소심 재판부는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규정이 아니라 조직법에 근거한 위임이나 지시 또는 명령도 그 기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럼 화이트리스트 사건은 어떤 직무권한에 해당할까. 재판부는 정무수석실이 맡은 업무에서 그 답을 찾았다.

대통령비서실 직제 및 관련 훈령에 따르면 정무수석 산하 소통비서관은 '국정철학 확산을 위한 국민과의 소통방안 마련'과 '시민·사회 단체와의 협력 추진'을 담당한다. 재판부는 "법·제도 등을 종합적으로, 실질적으로 관찰할 때 정무수석실이 전경련에 특정 시민단체 자금지원을 요청하는 행위는 직무권한에 속한다"고 해석했다. 정무수석실은 대통령 비서실의 하부조직으로 그 업무와 역할은 대통령 비서실장이 정하는 점 등을 고려하면, 김 전 실장의 화이트리스트 지시 역시 그의 직무권한 안에서 이뤄진 일이라고 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사건의 형식도 직무집행에 해당한다고 봤다. 협조 요청은 정해진 형식이 없고 구두로 이뤄질 때도 많다. 이 때문에 항소심 재판부는 꼭 공문이 오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또 김 전 실장 등 박근혜 청와대가 보수단체를 정권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감추고 ▲ 시민단체 간 불균형 해소 ▲ 국정철학 확산 등을 명분으로 내세운 만큼 전경련으로선 보수단체 지원 요청을 청와대의 업무로 받아들였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은 1심에서 "청와대에서 보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보수시민단체를 육성해야 한다고 설명했다"고 증언했다. 결국 전경련은 자신들이 자율적으로 판단하거나 심사할 기회를 잃은 채 화이트리스트 단체에 총 69억 7천여만 원을 지원했다.

김기춘과 양승태
 
a 영장실질심사 마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법농단’ 최종 책임자로 지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청사를 나서고 있다.

영장실질심사 마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법농단’ 최종 책임자로 지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청사를 나서고 있다. ⓒ 유성호


이 판결은 똑같이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을 받는 '사법농단' 관련자들에겐 다소 아쉬운 일이다. 법원이 비슷한 맥락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이 특정 재판부 동향을 살피고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재판 등 '청와대 관심사건'을 주시하라고 지시·실행한 것을 직권남용죄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은 김기춘 전 실장처럼 직무권한의 범위를 다투고 있다. 이들은 '재판 개입 권한'이란 없다며 직권남용죄가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화이트리스트 항소심 재판부는 직권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때 법률뿐 아니라 업무 내용 등도 살펴보라고 했다.

또 반드시 법에서 '이렇게 해야 한다/하지 말아야 한다'고 정하지 않았더라도 목적이 부당하거나 누군가에게 지시나 강제하는 형태로 일이 내려갔다면 직무권한에서 이뤄졌다고 봤다. 직권의 형식을 엄격히 따지기보다는 그 진행 과정 등이 직무에 다른 권한 행사로 보이면 직무권한 내에서 일어난 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다.

'사법농단' 관련자들은 '권한이 없다'는 주장뿐 아니라 그럴 의도가 아니었고, 보고서 작성 등은 일반 업무일 뿐이라며 결백을 말한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장은 지난 2일 자신의 공판에서 "법원 내부 현실에 적합한 사법행정을 펼치려던 것이었지 법원 감시 목표를 수행한 것은 아니다"라며 "법원행정처와 일선 법원 간 소통의 일환으로 볼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화이트리스트 항소심 재판부는 대통령 비서실이 전경련에 '국정철학의 확산'이란 명분을 내세운 점 역시 직권남용죄 성립요건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 판단기준이 대법원까지 이어지면 김기춘 전 실장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김 전 실장은 일단 대법원의 판단을 받아보겠다며 4월 16일 상고장을 냈다.
#김기춘 #양승태 #화이트리스트 #사법농단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AD

AD

AD

인기기사

  1. 1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2. 2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3. 3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4. 4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5. 5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