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묘. 오른쪽 비석 원 안에 두 아들을 형상화한 그림이 새겨져있다.
정소희
이중섭의 그림 세계는 역동적이면서 고독한 소의 세계와 부드럽고 따뜻한 어린이의 세계로 나뉜다고 한다. 각각 이중섭이 처한 현실과 지향하는 이상세계를 나타낸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제주도로 피난 간 이중섭은 그곳에서 '삶은 외롭고 슬픈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삶에 관한 그의 심상은 소의 세계에서 드러나고, 강렬한 붓 터치로 표현된다. 제주도는 그에게 전쟁의 피난처였지만,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안정을 찾았다. 바닷가에서 노는 두 아들을 동기 삼아 이중섭은 군동화(群童畵)를 그렸다.
시대의 격랑은 천재 예술가의 삶을 흔들었다. 그림 실력을 일찍 인정받아 일본으로 유학 가 부인을 만났지만, 결혼 직후 해방을 맞아 지금 북한 지역인 원산, 제주, 거제, 통영으로 피난을 다녔다.
임 교수는 "북한이 고향이었던 이중섭은 45년부터 50년까지 원산에서 미술학교 교사로 근무하는데, 이 시기 무슨 활동을 했는지 미술사에 알려져 있지 않다"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초해 선전 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짐작한다고 말했다. 전쟁이 계속되고 생활고가 이어지자 아내는 고향인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중섭은 1956년 홀로 사망한다.
'홍염'처럼 문학의 불꽃을 피우고 간 최서해
'새벽바다'(曙海)라는 이름을 가진 탓일까? 20세기 초 문단의 총아로 주목받던 최서해는 그가 쓴 소설의 제목 <홍염>처럼 강렬한 사회주의 문학의 불꽃을 피우고 요절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 계급의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동료들과 달리 최서해는 소작인 아들로 태어나 보통학교 2년 중퇴 학력이 전부다.
그는 식민지 시기 가난을 피해 북간도와 두만강변의 국경지대를 오갔고 장사와 육체노동을 하며 문학을 독학했다. 이 경험을 소재로 작품을 써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로 주목받은 그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부장 자리에 오르지만 위장협착증으로 수술을 받다 서른둘 나이로 사망한다.
죽어서도 감춰야 했던 장덕수의 이력
일행이 다음으로 찾은 곳은 장덕수 묘소였다. 무덤 주위로 둘레돌이 둘러져 있고 봉분 앞에 석상과 큰 비석도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우리나라 1호 여성박사이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김활란이 지은 비문이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