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한 수험생이 긴장된 모습으로 고사장에서 시험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희훈
지역사회를 넘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A 고등학교의 시험지 유출 사건이 시나브로 잠잠해져가고 있다. 누군가는 책임을 지고 어떻게든 결말이 나겠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흐지부지될 공산이 크다는 게 지역사회의 대체적인 여론이다. A 고등학교가 '잘 나가는' 사립학교라는 이유에서다.
지난 주말, 군에서 막 제대한 제자들과 만났는데,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A 고등학교 졸업생 두 명이 함께 했다. 제자 두 명과 같은 대학에 다니는 군대 동기라는데, 다른 친구들과도 이물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군 복무기간 단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A 고등학교의 시험지 유출 사건으로 화제가 옮겨졌다.
대다수 아이들 버리고 극소수에 올인
A 고등학교는 지역사회에서 '자사고 같은 일반고'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중3 자녀를 둔 많은 학부모들은 A 고등학교에 배정 받는 걸 축복으로 여겼고, 아이들도 '공부 하나는 제대로 시키는' 학교로 인식하고 있다. 만약 A 고등학교 배정 통지서를 받아들고 울먹이는 경우라면, 공부와는 담을 쌓은 아이들일 거라고 생각한다.
A 고등학교 교문에는 1년 365일 현수막이 내걸려있다. 대학입시철이면 명문대 합격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걸리고, 누군가 고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주기도 한다. 이따금 졸업생들 중 군 장성이나 고위공직 승진을 축하하는 현수막도 있고, 취업하기가 바늘구멍이라는 세태 탓인지 대기업 취직과 공무원 시험 합격을 알리는 것들까지 등장하기도 한다.
오가다 현수막의 내용을 읽다보면 솔깃해지기 마련이다. 내 자녀도 저 학교에 보내면 현수막에 이름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는 학부모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두 말할 나위 없는 착각이지만, 한 번 굳어진 선입견은 웬만해선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온갖 사달이 나도, A 고등학교의 인기는 지역사회에서 여전하다.
최근 한 재학생의 고발로 시험지 유출 사건이 드러났지만, A 고등학교의 내신 성적과 관련된 유사한 비리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고 한다. A 고등학교의 졸업생이 들려주는 '후일담'은 정녕 그곳이 학교인가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최상위권 아이들만 따로 모아놓고 특별 수업을 진행해왔다는 건 이야깃거리도 못 된다. 아이들 사이에 차별을 조장하는 '특별반'이나 '심화반' 운영은 금지되어 있지만, '자율 동아리'로 그럴듯하게 이름만 바꿔 그대로 운영하는 학교가 여럿이다. 그들 시각에서 보면, 이번 일은 최상위권 아이들에게 특혜를 주는 과정에서 '삐끗한' 것일 뿐이다.
듣자니까, 지금 A 고등학교의 내부에선 주변 학교들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 억울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설마 '재수 없이 걸렸다'고 여기는 걸까. 이른바 '물귀신 작전'이라도 써야 할 만큼 다급한 처지라는 뜻일 테지만, 공신력을 생명으로 하는 시험문제를 사전에 특정 아이들에게만 알려주는, 그렇게 간 큰 학교는 없다.
지난해 서울의 숙명여고에서 벌어진 시험문제 유출 사건은 어디까지나 쌍둥이 딸에 대한 빗나간 부정(父情)에 기인한 것으로, 이번 A 고등학교의 경우와는 또 다르다. 명문대 진학 실적을 높이기 위해 최상위권 아이들을 지속적으로 '특별 관리' 해왔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역 명문고라는 평판은 고작 대다수 아이들을 '버리고', 극소수에 '올인'한 결과였던 셈이다.
A 고등학교 졸업생은 그들의 모교를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최상위권에게는 '천당'이고, 나머지에게는 '지옥'이라고. 기실 이번 일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영문도 모른 채 수학시험 문제들을 '찍어야만 했던' 대다수의 아이들은 최상위권의 내신 등급을 올려주기 위한 들러리였을 뿐이니, 그들의 조롱을 수긍할 수 있다.
그들로부터 도저히 사실이라고 믿기 힘든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지금도 그러한지 알 수 없다는 전제를 덧붙였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특정 과목 시험 문제에 배점이 표기되지 않았다고 한다. 대개 문제지에는 출제교사가 난이도 등에 따라 문항별로 배점을 표기하도록 되어있다. 그래야만 시험 후 아이들은 답지를 받아들고 자신의 점수를 곧장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시험 후 OMR 카드의 채점이 끝나야 비로소 배점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문항별 정답보다 배점을 더 나중에 알게 됐다면서, 친구들끼리 맞힌 문항 수와 실제 득점이 달라 희비가 교차하는 해프닝이 심심찮게 벌어지곤 했단다. 당시에도 최상위권 아이들의 점수를 올려주기 위한 얄팍한 술수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그 학교에 자녀를 보낸 학부모도 그랬다고 하는 걸로 보아 과거에 그런 일이 있긴 있었나 보다.
온갖 편법에 도가 튼 학교, 교육청은 '감히' 대적 못해
고등학교 입학 당시의 성적이 거의 변화 없이 졸업할 때까지 이어지는 배경이라고 그들은 분석했다. 당시만 해도 중학교의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유치하기 위해 고등학교 교사들이 중학교 교무실의 문턱이 닳도록 오가던 때였다. 애초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며, 1지망으로 입학한 최상위권 아이들에겐 3년 내내 장학금을 보장해주기도 했다.
그들은 이번 일이 그다지 놀랍지 않다고 했다. 언젠가 터질 게 터졌을 뿐이고, 이보다 더 심한 일도 있었는데 얼마 못가 묻혔다면서, 온갖 편법에 도가 튼 모교의 '위세'는 교육청 정도로는 감히 대적할 수 없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직접 문제를 유출한 선생님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동료 선생님들도, 학부모들도, 이웃 학교들도, 나아가 감사를 벌이겠다며 호들갑떠는 교육청도 모두 공범이에요. 모르긴 해도, 그들 모두 특정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교육은 죄다 썩었다는 여론이 심화되길 바라고 있을 걸요. 그게 두루 책임을 면하는 길이니까요."
스스로도 공범이라는 그에게 시선이 모였다. 오랫동안 유사한 비리가 저질러졌지만, 누구 하나 말 꺼내지 못했다는 걸 에둘러 나무란 것이다. 그가 이번 일의 최초 제보자인 후배의 용기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도 그의 '훗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재학생들 중엔 이번 일로 대학 진학에 상당한 피해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불법임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득이 되면 눈 감고 마는 건 비단 후배들만의 모습은 아니라고 했다. 직접 가담하지 않았을 뿐, 동료 교사들도 모두 알고 있었을 거라고도 했다. 재학생도, 졸업생도 다 아는 사실을, 아무리 다른 학년, 다른 과목 교사라고 해서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기실 '남의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 게 교직 사회의 불문율이긴 하다.